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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담 Dec 06. 2021

스쳐 지나간 인연

인연 또한 가꾸어 나가야만 한다.

"놀면 뭐하니"

 2011년 4월, 일단 취업에 성공해 한숨 돌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회사의 예비 소집일은 7월, 그 사이의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 했지만, 하도 할 게 없어서, 집(하계동)에서 172번 버스 시작점을 타서 서울의 서쪽까지 가로질렀다가 돌아오는 버스 투어 정도밖에 할 게 없었다. 만약, 내가 지금처럼 글을 쓰던가 아니면 사진기라도 들고 있었으면, 아주 많이 많이 좋은 콘텐츠를 남겼을 텐데... 뭐 다 지나간 일이다. 그마만큼 그 당시 나는 인생에서 가장 할 거 없는(?)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취업 후 예비소집 혹은 설명회 전까지의 시간은 정말 인생에서 가장 Free 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초중고대, 그리고 군대, 취업준비를 모두 뚫고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이다. 사회생활을 해보면 알겠지만 시간이 넉넉히 주어지는 경우가 잘 없다. 언제나 시간을 아끼고 쪼개 써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11년 5월의 어느 날, 예비 입사자 대상으로 하는 카페에 모집 공고 하나를 발견했다. "지리산으로 가요 우리" 흥미로운 주제였다. 일정도 맞았다. 지금 어차피 나는 할 게 없는 사람 아닌가. 이럴 때 안 가보면 안 되겠다 싶어 재빨리 손을 들었다. 그렇게 글쓴이의 컨펌 댓글이 달렸고, 나는 지리산으로 향하는 그날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진짜 가야 하나"

 내 성격은 나도 잘 모를 때가 많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나는 '진짜 어딘가 가야 할 시간이 되었을 때' 내가 선택한 것임에도 후회를 하는 경우가 많다. 친구 모임도 그렇고 가족모임도 그렇다. 어느 날은 어머니가 "얘, 너 진짜 지리산 갈 거야?" 라며 묻기도 하였는데, 그때는 내가 선택한 것에 물리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꼭 간다고 대답했다. 출발 전날, 취업 준비할 때 들구다니던 백팩에 옷가지랑 이것저것 준비했다. 5월 말이라, 더울 거 같아서 긴 옷은 안 챙겼는데, 가방에 들어가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기대 반 걱정 반의 마음을 갖고 뜬눈으로 지새우며 서울역에 그다음 날 , 약속시간보다 30분 먼저 도착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곳에는 이 모임을 주도한 A를 비롯해 몇 명이 더 먼저 와있었다. '세상에 잠도 없나' 하고 생각하며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당시는 '나이'로 줄을 세우기 때문에, 형 동생으로 호칭을 정하자고 이야기하였고 서로 나이를 공개하며 일단 먼저 온 사람들끼리 '서열정리'부터 마쳤다. 이윽고, 오래 지나지 않아 8명 모두 모여 우리는 기차를 타고 행선지 남원역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당시 기차는 KTX는 아니었는데, 우리는 매점 칸에 모여 앉아 아이스 브레이킹을 했다. "서울에 사는 박종화라고 하고요, 나이는 27살입니다." 서로 번갈아가며 자기소개를 다 마친 후, 긴 시간 동안 딱히 할 말이 없는 채로, 조금은 어색함 분위기를 유지한 채 각자의 핸드폰을 바라보며 기차는 남쪽으로 향하였다.

그립다. 저 시절의 자유와 저 시절의 친구들이

"끈끈해진 동기애"

 남원역에 내리고, 우리는 지리산 코스로 등산을 시작했다. 사실 나는 아차산 정도의 뒷산일 것이라 생각하고, 등산화나 등산복, 그리고 스틱도 안 사 왔는데, 잘 챙겨 온 동기들도 많았다. 막상 코스를 등반하다 보니, 땀이 몸에서 비 오듯 쏟아졌다. 힘들면 서로 뭉친다고 했던가, 가파른 산을 오르다 보니, 서로 손도 잡아주고 뒤에서 밀어주기도 하며 점차 서로 간에 웃음꽃과 이야깃거리가 넘쳐 나기 시작했다. 숙소에 도착하여 몸을 씻고 식사를 하고, 반주를 마시며 우리는 예전에 우리가 살아온 이야기들을 하나둘 씩 오픈 하기 시작했고, 서로 친밀감을 느껴갔다. 

그리운 사람들. 언제쯤 다시 모일 수 있을까

 둘째 날, 우리는 아미고였다. 이미 10년 이상 친구 같았다. 구성원 모두가 여행을 좋아했고 이야기하는 것들도 좋아하고, 서로에 대한 배려심도 탑재한 사람들로 여행을 하다 보니 하루 만에 너무나도 많이 친해져 이제는 형 동생 오빠의 호칭이 어색하지 않고 장난도 스스럼없이 치는 사이가 되었다. 이 날도 무사히 즐겁게 산행을 마치고, 캠프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데, 너나 할 거 없이 허드렛일을 하겠다고 나섰다. 이런, 이런 걸로 경쟁을 서로 하겠다니.. 지금 생각하면 웃픈 일이다. 우리는 그 정도로 서로에 대해 친밀함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다음 날, 서울로 복귀해서 예비 소집일까지 몸 건강히 있으라고 아쉬워하며 헤어졌다. 한동안 단톡방은 불이 났다. 잠깐 슈퍼 가서 맥주 한 캔 사 오면 오면 +300은 기본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이런 인연이 영원히 지속될 줄 알았다...

초점이 흐리게 잡혔지만, 오히려 좋다.

"나 바쁜데, 나 일이 있는데"

 그렇게 우리는 7월이 되어, 예비소집 및 기본 역량강화를 마치고, 8월에 정식으로 회사에 들어왔고, 정신없이 남은 시간을 바쁘게 보냈다. 구성원들 8명의 부서가 모두 결정 났고, 근무지가 모두 이곳저곳 흩어지기 시작했다. 자연히 서로 볼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고, 일에 치이고, 또한 예비소집, 그리고 그룹 동기 모임 등, '지리산 여행' 모임보다 조금 더 '정당성' 이 있는 모임들에 참석하는 빈도가 많아졌다. 

 그때부터, 단톡방에는 '+숫자' 알람이 울리지 않기 시작했다. 어느새 '지리 사너'라는 방은 저 멀리 밀려서 있으나 없으나 한 방이 되어 버렸다. 나 또한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되고, 큰 애도 곧 태어나서 사실상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가 없게 되었다. 어느샌가, 단톡방에 "우리 언제 만나지?" 하면 그냥 읽은 숫자 카운트만 조용히 사라졌다. 복잡한 감정들이 들었을 것이다. 나가고 싶은데 정말 바쁜 사람, 혹은 나가도 딱히 이제는 즐거울 거 없는 사람 등등, 더 다양한 감정들이 들었을 것이다.


"우리는 무슨 인연이었을까?"

 인연이 끝난 것은 아니다. 아직도 서로의 경조사는 챙기는 모임이긴 하다. 하지만 그 이외로는 서로 회사에서 가끔 마주치면 안부나 묻는 정도이다. 그 당시 스물일곱의 나 또한 어려서, 우리 지리 사너 모임 구성원들을 '평생 인연'으로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돌이켜 보니, 인연이 계속되려면 구성원 모두가 노력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리 사너 모두, 서로가 지금도 좋은 감정을 갖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렀고 각자의 사정이 바뀌었다. 일하느라, 애보느라 힘들어 죽겠는데, 몇 년 전 2박 3일 여행을 갔었던 모임의 추억만으로 술 한잔 들이켜기엔, 그러한 반가움과 추억으로 구성원 모두가 모이기엔 현실적으로 너무 어렵다. 나도 브런치를 시작하며 글감을 찾는 도중, '인간관계'에 대한 소재를 생각하다가 생각해냈던 우리 모임이었다. 그 정도로 나는 옛날 스쳐 지나갔던 모임들 대부분은 여전히 오늘날까지 관계를 이어 오고 있지는 못하다.

 생각해 보면, 스쳐 지나가는 '한때의 인연'이 많다. 초중고를 거치며, 그 당시는 죽고 못 살 거 같았지만, 지금은 몇 남지 않은 내 친구들의 경우도 그렇고, 어서 와, 사회는 처음이지? (brunch.co.kr)에 기고한 내용처럼 새벽까지 으쌰 으쌰 함께 일을 했지만, 연락이 안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결국, "현실의 무게라는 핑계 하에, 나 스스로가 관계를 소홀히 한 탓 아닐까?"라는 자체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 누구의 탓도 아닌, 내가 관계에 정성을 들이지 못한 탓이 크다. 

 내일은, 한번 연락을 해봐야겠다. 저 멀리 이제는 아무도 대화를 하지 않는 '지리 사너' 채팅방에, 내가 먼저 말을 걸어봐야겠다. "모두들, 잘 지내지? 그냥 보고 싶어서"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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