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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담 Nov 30. 2021

평가 없는 세상

이 세상에, 유토피아는 없다.

"금주까지, 평가 시스템에 접속하시어 본인 평가를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아침부터 겨울비가 대 차게 내리더니, 이제는 완전히 겨울로 접어들었다. 금전적 측면에서 '농부들의 1년 농사'와 비할바는 못되지만, 우리들 직장인에게도 한 해 업무 농사의 평가를 받는 시즌이 있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1년에 두 번 평가를 작성하게 되어있다. 나는 평가가 싫다.(좋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은) '평가받는 거' 자체도 너무 싫지만 '평가 작성의 귀찮음'이 더 크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상반기 평가는 주관식으로서 각각의 항목에 대해 '소설'을 써야만 한다. '고객의 Needs를 선 발굴하여 이를 Meet함으로써 회사 매출 부분에 대해 기여함'과 같이 오글거리고 낯 뜨거운 작문 연습을 해야만 한다. 그런 측면에서 하반기 평가가 나는 더 낫다. 이미 부서의 정해져 있는 KPI가 존재하고 거기에 간단히 내 점수를 넣고 '제출'을 넣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상, 하반기 평가를 정성껏 쓴다고 결과에 반등이 있느냐? 없다. 사실, 처음 입사해서 평가를 입력할 때는 '정성껏' 입력하라고 배웠다. 하지만 1년 2년 그리고 10년 정도 회사생활을 지속하면서 느낀 점은 "쓸데없는 헛수고"라는 생각이 든다. 

 결과의 반등도 없는, 그렇지만 너무 대충 써도 안 되는 이 '밀린 숙제'같은 평가 Sheet. 조금이라도 좋은 평가를 기대하며 소설을 써 내려가는 내 마음도 shit이었다.


"상, 그거면 되었지"

 우리 회사의 평가 체계는 5단계로 나누어진다. 최상-상-중상-중-하, 그중 '최상과 상'을 받아야 연봉 인상률이 올라가게 된다. 평가 시스템 상 제출 말미에는 그 다섯 단계 중 내가 받기를 희망하는 단계를 적고, 간단히 이유를 밟힌 후 제출하게 되어있다. 사실 나는 한 번도 '최상'을 달라고 한 적이 없다. 동료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지만, 실제로 최상을 달라 한 적이 없다. 그렇다고 내가 욕심이 없어 그렇게 적는 것은 아니다. 본인의 연봉이 9프로 이상 올라갈 수 있다면 무엇이든 못하겠는가? '최상'을 받으면 그렇게 된다. 꽤 높은 수치의 연봉 인상이 이루어진다. (물론, 최상을 적는다고 주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나는 '간단히 이유'를 작성하는 부분에서 항상 신경이 쓰인다. 내 머릿속에 관통하는 생각 중 가장 큰 부분은, '내가 잘한 것이 과연 나 혼자 잘한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다. 아무리 내가 잘해도, 누군가 나를 위해 희생해 주었거나, 받쳐주지 못했다면 내 성과는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며 입체적이다. 누군가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 '본인이 잘해 받은 결과물이 '을 알면, 구성원들이 조금 더 겸손해지고, 배려심이 서로 생겨 팀워크가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평가 시스템 말미에, 간단한 이유를 작성하라 할 때 보통 부족했던 점을 보완하는 문장을 넣곤 한다. 

"올 한 해, 열심히 달려왔고 만족할만한 결과를 이끌어 냈다고 생각하나, 아직 부족함을 여러모로 느낀 한 해였습니다. 내년에는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보완할 생각입니다. 부족한 저를 이끌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그와는 별개로 '상' 미만으로는 평가 제출하지 않는다. 1년간 수고한 나를 위한 '자존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한 뒤, 결과에 만족하라"

 내가 여덟 살 때 일이다. 술에 항상 진심이시던(?) 아버지는 추웠던 어느 겨울날, 그날도 진심이셨다. 벨을 한번 누르고, 현관문을 덜컹덜컹 돌리는 소리만 들어도 아버지라는 것을 직감하고는 누군지 확인도 안 하고 문을 열어드렸다. "우리 아들, 아빠가 선물 사 왔지" 하며 보여주신 그 물건은, 옥돌로 된 계란 모형의 글귀 석이였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최선을 다한 뒤, 결과에 만족하라" 사실, 그 말을 마음속에 항상 넣고 생각하는 글귀는 아니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 머릿속에 스며들어 나의 사상을 지탱해주는 주요한 글귀가 되었다.

 어릴 적엔 누구나 듣던 천재(?) 소리도 듣던 나였다. 우리 어머니는 책을 많이 읽고 총명하다며 친척들도 그렇고 은근 자랑을 해놔서,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거는 기대치가 올라갔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기대치는 대입과 대학시절을 거치며 산산조각이 났다. 사실, 평가마다 최선을 다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조금이라도 좋은 결과를 위해 노력해왔던 기억이 생생하지만, 결과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회사에 입사해서는, 10년이 지난 현재 시점만 놓고 보면 내 기대 이상의 평가를 받아온 것 같다. 남들보다 진급도 먼저 할 수 있었고, 가는 곳마다 항상 환대를 받곤 했으니 말이다. 살아오며 처음 겪게 된 '나의 전성기'인 셈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매 순간 비록 평가 결과가 좋지 못하다 하더라도, '순간순간 최선을 다한' 나의 경험과 세계들이 쌓여 지금의 내가 된 것은 아닌가 추론해 보곤 한다.

어릴 적엔, 평가 없는 세상이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지극히 오산이었다.

 


"평가 없는 인생은 없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평가'를 당하며 살아가게 된다. 초중고 시절에는 인생의 모든 것처럼 여겨지던 '수능'을 위해 달려가고, 어른들이 말하길 "대학 가서 놀아"라고 해서 겨우 입학했건만, 그때부터 대기업 및 공무원 취뽀를 위하여 다시 달려가야만 한다. "입사하고 놀아"라고 해서 겨우 입사했건만, 나보다 스펙 빵빵한 동기 및 선/후배들에게 위축당하며, 1년에 두 번씩 평가를 당하며 자존감을 구겨야만 한다. 길지 않은 인생을 살며 느낀 점은, "평가 없는 인생은 없다"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피할 수 없는 것을 바라보는 시각을 달리 보면 어떨까? "남과의 평가"에 목을 매며, 누군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외모(이건 진짜 부럽다), 넓은 아파트 등을 가졌는데, 나는 이모양인가 하며 스스로를 책망할 시간에, 그 평가를 뒤 바꿀 수 있도록 작은 노력이라도 더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 말이다. 어차피 세상 자체가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공평한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도, 나중에도 크게 바뀌지 않을 "타인과의 평가"에 목을 매며 감정을 모두 태워 스스로 산화되기보다, 매 순간 최선을 다 해 인생을 살며, 언젠가 찾아올 "나의 전성기"를 미리 준비해 보는 것은 어떨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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