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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담 Jan 06. 2022

당신의 리즈 시절은?

누구에게나 있을, 혹은 찾아올 그 시절

 작년에 사람 관계에서 홍역을 앓고 난 이후, 가끔 생각나던 나의 리즈시절의 빈도가 더 잦아지기 시작했다.

어제는 와이프가 시장에서 사 온 굴보쌈을 먹보처럼 다 먹었더니 새벽에 속이 계속 안 좋아서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벽 두시쯤? 침대에 누워 뒹굴 거리다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유튜브를 켜서 자장가를 찾던 그때, 문득 군대 시절이 생각이 났다. 그래서 한번 검색창에 키워드를 넣어보았다.


"상서면 봉오리"


 오오, 몇 개 동영상이 올라온다. 나보다 더 지긋하실 것만 같은 프사를 하신 한분께서, 로드 무비 형식으로 내가 있던 자대와 숙소의 풍경이 담긴 운전 영상을 올려두신 것이었다. 15분? 정도 남짓한 영상이었는데, 그중에서 내가 있던 부대에서 숙소까지의 영상만 골라서 보게 되었다. 

부대앞, 변하지 않은 풍경과, 2년간 내가 머물던 숙소


'어, 저기는 원래 만능사였는데... GS 편의점이 생겼네'

'부대 문 새로 했나보다, 이제는 철문도 생겼네'

'저 가게는 아직도 장사하시나... 뼈해장국 맛집이었는데'


 과거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그때는 그렇게 싫던 그 공간이 이제와서는 추억이 되다니. 새삼 시간의 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대학시절 나의 심리상태는 매우 불안정했다. 

 우선, 그 당시에는 과 선택에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했다.(물론 지금은 밥벌이를 할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선택이었다.) 수능 점수에 맞춰 통근 가능한 학교와 과가 정해지다 보니, 딱히 내 미래에 대해 고민을 하지 않고 컴공을 선택했었다. 

 컴공과를 와서 보니, 이미 좋아하는 친구들은 저만치 멀리 치고 나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고, 나처럼 아무 생각 없이 '대학도 고등학교처럼' 마인드로 '주면 한다' 식 학습에 길들여진 학우들의 경우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누가 가르쳐 주는 거 없고, 자기가 좋아하면 밤을 새워서라도 역량을 길러 나가는 시기인 줄 몰랐던 것 같다. 지나고 보니, 그 시기는 그렇게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미래의 어떤 선택을 할지 그제야 탐색해보는 소중한 4년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울러, 그 시기 집에서 용돈을 주지 않던 시기라, 학업과 함께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는데, 이것이 나에게는 너무나도 어려웠다. 욕심 같아선 한 가지만 하고 싶었다. 그 당시는 '일'을 하고 싶었다. 학교에서는 전공과목 시험 보면 맨날 F에 가까운 성적을 받아왔기 때문에, 자존감이 너무나도 떨어져 있었다. (https://brunch.co.kr/@c9d642ac94b141d/42)


 마지막으로, 학업과 훈련을 병행하는 대학교 학군단(ROTC) 사관후보생 과정이 너무 힘들었었다. 3학년 때는 특히 '군인화'라는 미명 하에, 선배들의 가혹행위와 얼차려를 견뎌 내야만 했다. 하필이면 그때 전공과목도 잘 못 따라가던 시기라, 학교생활은 더더욱 재미가 없었고 고되기만 했다.


 이러한 이유들로, 나는 어서 차라리 졸업을 하고 싶었다. 우리 와이프에게도 계속 이야기 하지만, 대학 4년은 나에게 지우고 싶은 시간이다. 머릿속에 크게 남는 것도 없었고, 그저 '남들 다 가니까' 가는 숙제와도 같은 곳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의무복무를 위해 2년간 터를 잡게 된 강원도 화천, 그곳은 정말 사람의 자취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로지 모두가 '군인' 이였다. 장교로 군대를 가게 되었으니, 주변에서는 '편할 것'이라고 이야기해줬고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는 생각을 갖고 전역하게 되었다. '몸은 정말 편하지만, 마음은 고된 직책'을 장교들에게 부여해 주기 때문에, 나라에서 월급을 주는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2년 동안 하루하루가 가시방석 같았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책임자라며 나를 찾아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기대를 맞추기 위해 야근이 일상화되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응답해야 했으며, 때로는 조직을 지킬 줄 알아야만 했다. 이런 달갑지 않은 일들을 해야만 했으니, 치가 떨릴 법도 했으나, 사실 대학시절보다 이때가 더 나에게는 행복했던 시기였다.


 무엇보다, 학업과 일을 병행할 필요가 없어 좋았다. 일만 해도 사람들은 인정해줬고, 내가 싫어하는 공부를 하지 않아도 평가 결과에 대한 자학으로 인해 자존심에 상처가 갈 일이 없었다. 아울러 학창 시절처럼 돈에 쪼들일 일이 없었기에 처음으로 '소비'에 대한 맛을 알게 되었다. 금전적으로 여유가 생기자, 모임 같은데 가도 내가 사는 경우도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회 초년생으로서의 첫 훈련소라고 할까...?


 남자들은 군대 이야기를 하면 끝도 없다. 그래서 어서 글을 마무리 지을까 한다.

전역한 지 12년이 되어가지만, 그때의 악몽과 좋았던 기억 모두가 머릿속에 생생하다. 마치 어제 일과 같다. 그래도 그 당시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그 시절은 나에게 '리즈시절'이 맞다고 생각한다. 가난하고 철없고, 세상 물정 모르던 24살의 머슴아를, 사회로 내 보내기 전 훈련시켜준 그곳. 


 가끔은, 아주 가끔은 많은 군인들을 데리고, 목이 터져라 노래 부르며 구보를 하던 한여름의 그 뜨겁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다.
행군 후, 이곳을 지날 때면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 집에 온듯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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