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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TheBall Mar 07. 2023

친구 같은 아빠에 대한 짧은 고찰

짧게 쓰려고 했는데..

8살, 이제 갓 초등학생이 된 딸아이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그저 맹구같이 빙그레 웃으며

친구 같은 아빠가 되겠노라고 다짐했던 것이 떠오른다.


도대체가 친구 같은 아빠란 무엇일까.

방금도 아빠에게 눈을 흘기며

백안시를 보여주는 딸아이를 바라보며

졸려서 그런가 원래 성격이 저런가

사춘기가 빨리 와서 영춘기(?)인가 싶다가도

내가 뭘 잘못하고 있나 보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친구 같은 아빠는 생각보다 어렵다.


일단은 잘 웃겨주고

맛있는 거 장난감 잘 사주고

놀 때 신나게 놀아주고

많이 관심 가져주고 물어보고

딸아이와 단둘이 시간을 많이 가지는 것은

좋은 아빠는 되어도 친구 같은 아빠는 아닌 듯하다.


친한 척 친절한 척한답시고

아이에게 존댓말 하는 건 진짜 아닌 것 같다(후회)

친한 친구가 본인한테 존댓말을 하면

그건 놀릴 때나 그렇지 장난으로 들릴 뿐이다

형식은 존댓말인데 대부분 이거 하세요 저거 하세요

요청이 더 많기 때문에 더더욱 친구와는 거리가 멀다.


평소에는 잘해주다가 갑자기

버럭하고 무섭고 벌벌 떨 정도로 화를 내고

목소리를 높이는 아빠라면?

교육의 효과는 있을지언정 ‘친구 같은’의 관계로 보면

뭐야 이 미친놈? 하며 의절할 사유에 가깝다.


좋은 아빠와 훈계하는 아빠와 친구 같은 아빠는

서로 간에 trade off가 있다.


좋은 친구의 속성 중에 우선 전제조건을 보면

같은 환경의 비슷한 지식과 철학을 가진 동년배라는 것이다.

아빠와 딸은 이미 세월과 경험에서 차이가

많이 나는 만큼 좋은 친구의 조건과는 한참 멀다.

자연스럽게 말속에서 가르치려들고 제한하려 하고

딸아이가 알아듣기 어려운 고차원적인 언어로 설명하려 든다.

마치 지금의 넌 모르겠지만 언젠간 알게 될 거야라는 식으로.

친구는 긴 인생으로 봤을 때 지식과 경험이 거의 비슷하고

같은 것을 배우는 입장으로 고만고만하며

나도 모르는 것은 친구도 모를 확률이 높다.

따라서 첫 번째, 친구 같은 아빠의 조건은
아는 것은 가르쳐 주되, 모르는 것은 모른다 인정하고 같이 찾아보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아는 완벽한 아빠일 필요가 없다.


어려움 속에 싹트는 전우애를 아는가

여기서 우애라는 것이 바로 ’ 친구 같은 ‘의 의미이다.

친구라는 것, 우애는 공공의 적이 있거나 공통의 어려움이 있어서

함께 이겨나가는 와중에 발생하곤 한다.

생각해 보면 아빠와 8살 딸아이는 같은 어려움에 봉착하는 일이 거의 없다.

전우애가 생길 수가 없다. (엄마가 공공의 적이면 전우애가 생기기도 하지만)

보드게임을 같이 하거나 같이 운동을 해도 그렇다.

아빠에겐 너무 쉬워서 일부러 져주거나 핸디캡을 안고 시작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렇다고 둘 모두를 혹독한 상황으로 일부러 몰고 가는

비상식적인 접근도 하기 어렵다.

두 번째, 친구 같은 아빠의 조건은 같은 어려움을 함께 겪기이다.
둘 다 안 해본 것을 해보거나 아이가 잘하고 자신 있어하는 종목에
아빠가 도전하는 식으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친구의 조건에 같은 배경과 어려움이 있는 반면

비밀과 추억이라는 것도 있다.

아이가 누구에게 관심이 있는지,

어린이집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꾸 말하지 않고 숨기려고만 한다는 건

이미 친구 같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아빠가 묻지 않아도 떠벌떠벌 있었던 얘기를 먼저 하고

과거에 아빠랑 이런 추억이 있었지 하며 얘기한다면

그건 정말 좋은 관계인 듯하다.

세 번째 조건은 비밀이든 추억이든 현재의 스토리를 서로 공유하는 관계이다.

듣는 당시에 관심이 좀 떨어지고,

자꾸 같은 얘기를 반복해서 집중력이 떨어진다고 해도

아이의 말에 귀 기울여주자.

반대로 아빠의 일을 아이가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아빠의 스토리, 상황, 마음가짐도 한 번씩 편하게 얘기해 주는 게 좋다.

그렇게 하다 보면 아이가 정말로 비밀을 술술 말할 수 있는 친구로

인식하게 될지도 모른다.


마지막 조건이자 최근 가장 뼈저리게 느낀 점은
선을 넘지 않는 것이다.

(영화 기생충이 생각난다)

아이도 한 명의 인격체이다.

책으로 글로 읽은 그 말은 실천하기가 참 쉽지 않다.

몸으로 놀아준답시고 억척스럽게 껴안고 던지고(?) 궁디팡팡(?)하는 것이나

귀엽다고 강제로 뽀뽀하고 하던 것들,

가르쳐준답시고 태도나 말투, 말꼬리 하나하나 교정하는 것들이

아빠의 권리이자 의무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슬슬 자신의 자아가 단단해지고 있는 아이의 관점에서는

선을 넘는 것들이 생기고, 무의식적으로 반발하고 밀어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책에서 반항기라는 말은 어른들이 편한 대로 만들어낸 용어라고 했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부모의 지속적인 압박에 드디어 반발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이 생기는 시점이다.


다시 친구 같은 아빠로 돌아와서

스킨십을 할 때나 놀이를 할 때나 훈육을 할 때도 항상

아이의 입장에서 선을 넘지 않았나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선을 넘지 않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이는 그대로 인정해주어야 할 것 같다.

진짜 친구와 다른 점은 아빠는 무한한 사랑을 백그라운드에 깔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을 핑계로 서툰 손을 건네는 것보다 한 번씩만 더 믿고 맡기는 것이

친구 같은 아빠의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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