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보다 잔세스칸스에서 일찍 돌아왔어. 저녁 먹기 전 까지는 시간이 꽤 남았었지. 암스테르담의 마지막 날을 그냥 보내기 아쉬웠던 우리는 카페와 가게들을 실컷 돌아다녔어. 한국에서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 유명한 디자인 브랜드 샵들도 구경했지. 이곳저곳 구경도 하고, 카페에 앉아 지친 다리를 달래며 조금 쉬었더니 금세 배가 고파졌어.
저녁에는 지난밤 야심차게 찾은 버터 스테이크 집을 찾아갔어. 자리가 없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좁지만 아늑한 자리가 하나 남아 있더라고. 나는 여행을 다니면서 맛집을 잘 찾아다니는 사람이 아닐뿐더러 항상 신기한 음식에 도전하는 편이야. 그러다 보니 내가 고른 음식들은 특이하기는 했지만 맛있었던 적은 별로 없었어. 이번 여행에서도 역시 엄마가 만족할 만한 음식을 고르지 못해 힘들었어. 대부분 눈에 보이는 음식점에 들어가거나 KFC 혹은 마트에서 간단히 사 먹고 그랬잖아. 그래도 암스테르담의 마지막 저녁은 기억에 남을 만큼 맛있었으면 해서 한국 블로그의 힘을 빌려 보장된 맛집을 열심히 찾아봤어.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는 버터 스테이크와 샐러드 그리고 와인을 주문하고 우리는 한참을 떠들었지.
여행의 중반도 오지 못한 짧은 기간이었지만, 나는 정말 많은 것들을 느꼈어. 며칠간 엄마와 타지에서 24시간 내내 붙어 다니면서 엄마의 시간이 참 많이 흘러버렸다는 것을 알았다고 엄마에게 말했지. 가장 첫 번째로는, 암스테르담에서의 첫날, 노안이 찾아와서 이제 돋보기가 없으면 메뉴판의 글씨가 보이지 않는다는 엄마의 말에 깜짝 놀랐다는 거야. 서울에서 지내다 가끔 청주에 갈 때면 하나둘씩 늘어나는 엄마의 주름만 보았을 뿐 그 외에 엄마가 겪는 변화에 대해서는 무감각했어. 한 때 나보다 영어를 잘했던 엄마니까 메뉴 고르는건 엄마의 몫이라며 작은 영어글씨가 빼곡한 메뉴판을 떠넘겼는데 그 때 엄마는 얼마나 멋적고 속상했을까. 뒤늦게 알고 많이 미안했어.
엄마가 의지할 수 있을 정도로 의젓한 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으면서 정작 엄마에게는 어떤 배려가 필요한지 전혀 몰랐던 거야. 엄마에게 내 이야기를 조잘조잘 떠드는 것에만 익숙했네. 엄마의 노화에 대한, 어쩌면 조금은 씁쓸하기도한 이야기를 하려니 어색하기도 하고 울컥하는 마음에 눈물이 났어. 난 늘 엄마처럼 되기를 바라면서도, 언젠 가는 내가 엄마보다 한 발 앞선 생각할 수 있을 때가 올 거라 믿었어. 그때가 되면 내 생각이 더 옳다고, 엄마가 틀렸다고 생색내고 싶었지.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그게 얼마나 철없는 생각이었는지 깨달았어. 엄마의 뒷모습만 보고 달려가다가 엄마의 옆모습이 살짝 보일 만큼 따라잡고는 신나서 엄마의 얼굴을 보니 그제야 엄마의 힘에 겨운 표정이 보이는 거지. 예상은 했지만 직접 보고 나니 마음이 저릿한 거야. 물론 엄마의 신체적 변화를 직접 느낀 것이 슬플 뿐이지 여전히 엄마는 멋지고, 나는 엄마의 반만 따라가도 충분히 만족스럽다고 생각해. 내가 아직 겪어보지 못한 시간을 먼저 겪고 있는 엄마를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아. 어쩌면 나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엄마를 평생 뒤쫓아가며 크고 있나 봐. 고작 와인 한 잔에 마음속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해버린 밤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