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프트 숙소에 짐을 놓은 후, 우리는 델프트에서 가까운 헤이그를 먼저 다녀오기로 결정했어.
점심시간도 채 안되어 도착한 헤이그는 구름이 가득해 어둡고 조금 으스스했어. 맨 처음으로 향한 곳은 대한 독립운동의 발자취가 있는 헤이그 열사 박물관이었지. 박물관이라고 하기에도 보잘것없이 겨우 유지되는 작은 건물이었지만 안내해주신 분의 꼼꼼한 설명과 사진들은 이곳이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려주기에 부족하지 않았어. 그 당시 말도 통하지 않는 이 먼 나라 낯선 땅까지 오게 한 간절함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역사시간에 그렇게 중요하다고 강조해놓고는 막상 그 흔적이 가득한 현장은 제대로 된 정부의 지원과 관리를 받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웠어.
잠시나마 반가운 한국을 만나고 밖으로 나오니 헤이그의 거리는 더 낯설고 쓸쓸하게 느껴졌어. 복잡한 생각들을 뒤로한 채 헤이그 시내로 이동했지. 쓸쓸한 거리와 달리 시내는 화려하고 북적일 거라 생각했는데, 평일 오전의 시내는 한적했어. 텅 빈 거리를 보는데 갑자기 왠지 모를 무서운 느낌이 들었어. 지나갈 때마다 대마초 냄새가 나던 암스테르담에서도 이렇게 긴장하지는 않았는데. 복작복작했던 암스테르담과 달리 넓고 쭉 뻗은 도로에 선을 넘지 않고 서있는 큰 상점들, 그리고 멀찍이 떨어져 서있지만 서로 아는 듯 한 눈치를 보내는 덩치 큰 남자 두 명. 일단 문 연 가게라도 들어가야겠다 하는 마음으로 거리를 살피며 걷고 있었어.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지만 나는 옷 가게 앞에 서있는 덩치 큰 남자 한 명이 굉장히 거슬렸어. 경호원이 있을 만큼 비싼 옷을 파는 가게는 아닌 것 같은 데... 혹시 쇼핑하는 일행을 기다리는 중인가 싶어 가게 안을 들여 다보며 지나갔어. 그런데 그 순간 내 가방을 향해 손을 뻗는 그 남자의 모습이 가게 창문에 비쳐 보이는 거야. 깜짝 놀라서 휙 돌아섰더니 너무도 뻔뻔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멈추더라고. 주변에 사람이 많았다면 그냥 조금 빨리 걷자 했겠지만, 거리에 사람도 없었고 그는 우리를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았어. 엄마와 나는 눈앞에 보이는 감자튀김 가게로 빠르게 들어갔어. 다행히 가게 안으로 따라 들어오지는 않더라고. 생각보다 맛있었던 감자튀김 덕분에 놀란 마음은 금세 가라앉았지만,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어.
헤이그 시내에서 트램을 타고 종점까지 가면 스헤브닝겐 해변이 나와. 스헤브닝겐 해변은 원래 한적한 어촌이었는데 레저시설이 들어오면서 네덜란드 최고의 여름 휴양지가 되었대. 나는 헤이그 시내의 으스스한 느낌을 멋진 바다와 저녁식사로 날려버리려는 계획이었어. 그런데 우리가 갔을 때는 11월이었잖아. 휴양지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인적은 드물었고 쓸쓸한 바닷가에 카지노만 외롭게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지. 나는 엄마가 실망했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우울해지려고 했어. 그런데 엄마는 이때 힘이 난 건지 아니면 바다를 봐서 좋았는지, 신나게 폴짝폴짝 뛰더라고. 저 멀리서 사진 촬영 중인 모델과 사진작가를 발견하더니 우리도 멋진 포즈를 보여주자며 엄마가 갑자기 온갖 폼을 잡기 시작하는 거야.
엄마 덕분에 갑자기 웃음이 터져서 한동안 둘이 여러 장의 사진을 찍으면서 깔깔거리며 웃었어. 지금 생각해보니 엄마도 낯선 곳에서 움츠러들었던 마음과 답답함을 터트렸던 것 같기도 하고 내 기분을 달래주려고 일부러 웃겼던 것 같기도 해. 날씨가 흐려 멋진 노을은 볼 수 없었지만 사진을 볼 때마다 엄마와 깔깔대며 웃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 해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우리는 사진을 찍으며 한참을 그렇게 놀았어. 캄캄해진 바다를 뒤로 한 뒤 음식점을 찾아 헤매다 어느 한적한 식당에서 따뜻한 홍합요리와 와인 한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