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경단을 만나다
다시 과거, 대도시 블롯 근처 숲 속.
토리는 얼굴 위로 쏟아지는 따스한 햇살에
눈을 떴습니다.
공기엔 투명한 이슬의 숨결이 맴돌았고,
나뭇가지마다 앉은 새들이
숲의 인사처럼 지저귀고 있었습니다.
잎사귀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은
금빛 부스러기처럼 반짝였고,
토리는 그 빛줄기를 따라 천천히 눈을 깜빡였습니다.
“…어라? 지금... 몇 시지?”
한참을 머물다 고개를 든 순간,
어느덧 정오의 햇살이 숲을 환하게
감싸고 있다는 걸 깨달은 토리는
당황한 듯 머리를 두 손으로 감쌌습니다.
“아… 너무 많이 잤나 봐.
어제 하루 종일 돌아다녔더니.”
토리는 느긋하게 몸을 일으켰습니다.
주변은 여전히 낯설었지만,
묘하게 편안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도 살며시 흔들었고,
작은 벌레들은 햇살 속을
수영하듯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어젯밤의 조각난 기억들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습니다.
처음 도착한 대도시, 병원을 전전하며
솔이를 찾아 헤맨 시간.
낯선 여우에게 속았고, 족제비들에게 쫓겼으며,
그리고... 그녀.
“아, 이름이라도 물어볼걸...”
그녀의 얼굴이 뚜렷하게 떠올랐습니다.
단단한 눈빛, 퉁명스러운 말투,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기운을 풍기던 그 다람쥐.
‘이름도 모르는데... 왜 이렇게 신경 쓰이지?’
토리는 멍하니 앉은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날이 밝는 대로 떠나.”
어쩐지 가슴에 쿵하고 내리 찧는
그녀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짐을 꾸리기 시작했지만,
마음과 다르게 손은 느릿했습니다.
자꾸만 시선이 숲 속 어딘가를 향했습니다.
누군가 나타나길 바라는 것처럼.
‘혹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짐을 다 챙겨놓고도 한참을 앉아 주변을 둘러보던
토리는 결국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오늘은... 어디로 가야 하지...”
그때였습니다.
큰 나무에서 내려와 땅에 발을 디디자,
등 뒤에서 풀들이 흔들거리는 소리와 함께
슬그머니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습니다.
'혹시 그녀가 돌아온 걸까?'
설레는 마음으로 빠르게 돌아본
토리는 눈앞의 풍경에 순간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수상한 눈빛을 한 족제비 세 마리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경단 은신처에서 나오는 걸 봤다. 넌 뭐지?”
“분명... 자경단과 한패로군.”
“여우 두목님께 보고하자.
처음 보는 신입이 하나 늘었다고 말이야.”
“저, 저는 그냥 지나가는…!”
토리는 당황해 말을 잇지 못했고, 순식간에 족제비들에게 포위당했습니다.
‘이건... 큰일 났다.’
무언가 말을 해야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슈우욱~!!”
화살 하나가 날아와 족제비의 무기를
툭 쳐내며 떨어뜨렸습니다.
연이어 날아든 화살이 다른 족제비들의
무기들도 떨어뜨렸고, 이내 연막탄이 터졌습니다.
자극적인 냄새가 주변에 퍼지며 족제비들은
고통스레 코를 움켜쥐었습니다.
족제비들이 괴로워할 때,
토리는 아무렇지 않은 걸로 보아
그 냄새가 ‘족제비 전용 무장해제 연기’라는 걸 직감했습니다.
연기 사이로 다섯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습니다.
그중 가장 큰 그림자가 돌진하더니
세 명의 깡패들을 단숨에 쓰러뜨렸습니다!
족제비들은 겁에 질린 채 부랴부랴 도망가버렸습니다.
“어이, 꼬마. 어디 다친 데는 없냐?”
바르크였습니다. 듬직하고 믿음직한 체격에서 묻어나는 묵직한 목소리.
“대장이 말한 애가 너구나.”
루칸이 조용히 다가오며 토리를 살폈습니다.
그의 눈빛은 날카로웠지만,
신중한 관찰자의 느낌도 담고 있었습니다.
“어머머~ 지금까지 늦잠 자다 족제비들한테
납치당할 뻔한 거야? 귀여워라~”
릴리가 반짝이는 눈빛으로 가까이 다가와
토리를 빤히 바라봤습니다.
‘이... 이 다람쥐는 왜 이렇게 가까이 오는 거지?’
토리는 당황해하며 조금 뒤로 물러났습니다.
그때, 멀찍이 서 있던 마지막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다가왔습니다.
어제 만났던 바로 그녀였습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했습니다.
“날이 밝는 대로 떠나랬더니... 이 꼴이구나.”
"그만해~리나. 아직 놀랐을 텐데
진정하고 이야기해도 늦지 않아."
벨라가 리나의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타일렀습니다.
{리나… 이름이 리나였구나.}
토리는 가슴 깊이 그녀의 이름을 되뇌었습니다.
이름 하나만으로도 희한하게 가슴이 설레어왔습니다.
단단하고 멋있고, 뾰족하고 까칠한데,
가끔은 그 안에서 부드러운 숨결이
새어 나오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리나는 귀찮다는 듯 고개를 돌렸지만,
그 말투 너머에서 느껴지는 무언의 걱정이
토리의 가슴을 아련하게 휘저었습니다.
벨라가 토리를 나무 밑 그늘로 데려가
천천히 마음을 진정하도록 앉혔습니다.
“근데 쟤는 이제 어떡하지?”
루칸이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완전히 족제비 갱단의 타깃이 됐어.”
“혼자 놔두면 곧 잡혀가.”
바르크가 단호히 말했습니다.
“좋은 싫든 데려가는 수밖에 없다.”
모두가 리나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녀는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쳇. 귀찮게 됐군. 저 녀석도 데려가자.”
그 순간 릴리가 환하게 웃으며 토리에게 다가와 귓속말하듯 속삭였습니다.
“후훗, 우리 대장한테 이렇게 걱정받는 건 흔치 않다?
신입, 특별한 애네~”
그녀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눈빛은 장난기 가득한 호기심과
묘한 감정이 섞여 있었습니다.
‘이... 이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이지?’
토리는 천천히 모두를 바라보았습니다.
자신 또래의, 젊고 생기 넘치는 이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선 리나.
자연스럽게 토리의 시선은 리나에게로 향했습니다.
숲 바람이 그녀의 털을 부드럽게 스치며 빛을 냈고,
잎사귀가 흔들릴 때마다 그녀의 그림자가
홀로 숲 속에 흔들렸습니다.
‘강해 보이지만... 어딘가 외로운 사람 같아.’
“우리가 누군지 궁금하지?”
벨라가 다정하게 말했습니다.
“우린 자경단이란다.
저 블롯에 사는 나쁜 여우 두목과 족제비들이
주민들을 괴롭혀서 우리가 모였지.
말하자면 악당에 맞서 싸우는 작은 모임이야.”
“정말 멋진 일을 하시네요…”
토리는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때 리나가 다가와 말했습니다.
“너, 우리와 함께 가자.”
“네..? 전 친구를 찾아 여기 왔는데… 그게…”
“지금은 어디도 못 가. 넌 족제비들한테 찍혔어.
지금 도시로 가면 바로 납치당해.”
“…”
“넌 오늘부터 우리와 함께 한다.
우린 약한 이들을 지키고, 도시를 지킬 거야.”
토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숲을 가로질러 가는 풍경은,
전날과는 전혀 다른 세계처럼 토리의 눈에 비쳤습니다.
이건 운명일까?
아니면 그냥 우연일까?
그녀를 따라가는 이 걸음에,
내가 찾는 ‘솔이’의 실마리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
그리고…
그 실마리 끝에 리나가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문득 생각해 버린 토리였습니다.
숲 속 자경단 본부.
커다란 동굴 안, 도토리와 나뭇가지로 만든 테이블 위엔
빛바랜 지도와 약초들, 생각보다 큰 차주전자,
그리고 작은 머그컵이 여러 개 놓여 있었습니다.
벽에는 벨라가 짠 담요와 릴리가 장식한
야광버섯이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여기가 바로 자경단 본부다.”
바르크가 안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릴리가 토리 옆에 찰싹 달라붙었습니다.
“신입! 긴장 풀어~ 족제비도, 여우도, 다 걱정 마! 우리가 다 막아줄게!
대신 내 수다는 못 막을걸?”
루칸이 나뭇잎 그늘 속에서 웃으며 말했습니다.
“사실 족제비보다 릴리 수다가 더 무서워.”
벨라는 토리에게 따뜻한 차를 내밀었습니다.
“많이 놀랐지? 이건 마음을 가라앉히는
약초로 만든 거란다.”
토리는 머뭇거리며 머그컵을 받았습니다.
“… 정말… 이상해요. 어제부터 오늘까지,
모든 게 꿈만 같아요.”
리나는 나무에 몸을 기댄 채
밖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릴리가 도토리 빵을 내밀며 깔깔댔습니다.
“자자~ 신입 환영식 해야지!
그리고 내일부터는 특훈 시작이야!
나랑 둘이서~ 헤헷.”
그 웃음은 장난기 가득했지만,
어딘가 수줍음도 섞인 눈빛이었습니다.
“첫 미션은 릴리의 수다 견디기지.”
루칸이 장난기 어린 눈으로 말했습니다.
“하하하, 그건 신입에겐 꽤 험난한 훈련이지!”
바르크가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렇게 숲은, 한 겹 한 겹 시간이 겹쳐지면서
더 깊은 초록으로 진해져 갔습니다.
잎새 너머 흩어진 햇살의 조각들이
리나의 어깨 위로 조용히 내려앉고,
바람은 이 모든 이야기가 싹틀 수 있도록
우연의 씨앗을 품고 날아갔습니다.
멀리서 고요하게 흐르던 하늘과 구름은,
마치 오래된 태고의 목격자처럼
조용히 그들의 첫날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 순간,
숲과 모든 시간은
여섯 명의 심장과 맞닿아
아직 쓰이지 않은 전설 속 이야기처럼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새겨지고 있었습니다.
토리는 이 낯선 숲에서, 어쩌면 새로운 무언가가
시작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무언가의 중심에는 분명 리나가 있었습니다.
(다음 편 - '토리의 성장과 돌무더기 함정'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