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버린 숲, 바르크
잿빛 숲 한가운데서 릴리가 코를 막으며 투덜거렸습니다.
오래전 상처를 고스란히 품에 안은 채,
불타버린 숲은 여전히 탄 냄새가 가득했고
회색빛 공기 속으로는 가냘픈 재가
무기력하게 떠돌고 있었습니다.
땅은 촉촉했던 눈물을 오래전부터
잃어버린 듯 메말라 있었고,
나뭇가지마다 검은 그을음이 새까맣게 내려앉아
모든 슬픔이 한데 엉겨 붙은 듯했습니다.
보통 때라면 추적자 릴리의 날카로운 후각은 누구라도 단번에 찾아낼 수 있었겠지만,
이곳에서는 후각뿐 아니라 모든 감각마저
안개처럼 흐릿해졌습니다.
루칸이 가만히 몸을 낮춰
숲의 재와 흙을 쓸어 올렸습니다.
"이런 곳에, 생명이 숨 쉴 수 있을까?"
마치 죽음과 삶이 경계를 이루고
서있는 듯한 이 땅에서는
숨을 쉴 때마다 불에 그을린 냄새와
슬픈 기억에 파묻힌 흙냄새,
그리고 오래된 눈물의 갈증까지
가슴을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릴리는 검은 숯덩이와 흩날리는 재 사이를 누비다가
쓰러진 나무 위로 풀쩍 뛰어올라
숲 전체를 깨우듯 크게 외쳤습니다.
루칸이 그런 릴리를 애처롭게 바라보았습니다.
“릴리도 못 찾는다면, 이젠 어떡하지?
대장, 바르크가 정말 아직도 여기 살고 있을까?”
리나가 침착하게 주위를 둘러보다 말했습니다.
“이 숲은 바르크의 고향이다.
마지막까지 지킨 곳이지. 반드시 어딘가에 있을 거야.”
동료들의 지친 표정을 지켜보던 벨라의 눈길이
문득 어느 한 곳에 멈추었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희망처럼,
잿더미 사이에서 용감하게 고개를 내밀고 있는
어린 새싹의 모습이었습니다.
"모두 이걸 봐!! 아직 이 숲은 살아있어!
바르크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처럼."
릴리가 달려오더니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풀잎 냄새를 맡았습니다.
“이건.. 바르크 오빠가 예전에
즐겨 씹던 그 풀 같은데?!
반가운 추억의 풀을 보며,
모두에게 잠깐이나마 미소가 번졌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치더니
많은 재가 날리면서 순식간에 하늘을 회색빛으로 덮었습니다.
시야조차 흐려진 바로 그때,
불에 탄 모습으로 위태롭게 서있던 근처의 나무 하나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부러지더니
벨라의 머리 위로 쓰러졌습니다!
"악!!! 벨라 언니!!"
릴리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순간, 아무도 손쓸 겨를 없이 나무가 쓰러지는 찰나—
땅이 쿵! 하고 울리더니 나무 뒤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잿더미 공기를 헤치며 솟구쳐 올랐습니다.
검은 그림자는 번개처럼 나무 앞으로 뛰어들어,
철모처럼 두터운 머리와 우람한 어깨로 쓰러지는 나무를 떠받쳤습니다.
근육질 다리로 땅을 단단히 박차더니,
마침내 나무를 한쪽으로 힘껏 밀어냈습니다.
이윽고 연기 속에서 실루엣이 천천히 드러나자
자경단 모두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감돌았습니다.
마지막 자경단 동료,
최강의 멧돼지 전사 바르크.
바르크가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탁탁 털며 말했습니다.
“누가 내 숲에서 이렇게 쩔쩔매고 있나 했더니.. 너희들이었군.”
릴리는 환호를 지르며 달려왔습니다.
“바르크 오빠! 이번만큼 반가운 적이 없었어!!
우리 진짜 여기서 사라질 뻔했다니까요!”
바르크는 껄껄하고 웃더니, 다정하게 릴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습니다.
“릴리, 너는 한결같이 시끄럽구나.
네 목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멀리서도 들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동료들을 보며 말했습니다.
"다들 오랜만이다. 정말.. 반갑다."
루칸도 손뼉을 치며 말을 보탰습니다.
“와~바르크 형은 더 멋있어진 거 같아요!!
몸도 완전 더 좋아진 거 봐!!
솔직히, 여기 잿더미 보니 형도 떠난 줄 알았는데!
역시 바르크 형 다워요.”
바르크가 으쓱하며 씩 웃었습니다.
“이 숲은 내 고향이니까. 잿더미조차 다 내 집이다.
너희, 다시 만나니 참 좋다.”
리나도 한 발 앞으로 다가서며 바르크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바르크"
바르크가 굳세게 그 손을 잡으며 짧게 대답했습니다.
"대장"
두 사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짧지만 단단한, 옛날과 변함없는 인사였습니다.
"에헴, 벨라 언니—! 바르크 오빠!
오랜만에 인사 좀 제대로 해봐요.”
릴리가 헛기침을 하며 리나 뒤의 벨라를
슬쩍 가리켰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누구보다 먼저 밝게 인사를
건넸을 벨라였지만,
오늘은 어쩐지 말없이 서 있었습니다.
작고 동그란 손은 치마 자락을 꼭 쥔 채,
그녀의 눈길은 땅을 향해 조용히 내려앉아 있었고,
긴 속눈썹 아래의 두 눈은
숲의 아침이슬처럼 떨림을 머금고 있었습니다.
바르크가 벨라를 바라보며 평범한 인사를 했습니다.
“벨라, 오랜만이다.”
벨라는 짧게 바르크를 바라보다 말했습니다.
“… 그래, 바르크.
너도.. 잘 지냈지?”
바르크가 껄껄 웃으며 말했습니다.
“벨라! 네가 해주던 아침안개 차가 그리웠다.
몸 여기저기 뻐근할 때마다 생각났지.”
벨라는 아무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릴리는 속으로 웃음을 참느라 애썼습니다.
“어머~ 벨라 언니, 안색이 별로인데,
바르크 오빠한테 어깨라도 주물러달라고 해요~!”
벨라는 당황해하며 손사래를 쳤습니다.
“아, 아냐! 이건, 그… 아까 연기 때문에 그래!”
"맞다. 여기는 바람 불 때마다
연기가 독해서 오래 못 있는다.
나도 오늘 나무 땔감 구하러 왔었다가
릴리 목소리 듣고 뛰어온 거다.
일단 우리 자리를 옮기자. "
"으이그~저 눈치 없는.. 멧돼지 같으니라고!"
릴리가 입을 샐쭉거리며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벨라는 모두가 바라보지 않는 순간마다,
몰래 바르크를 바라보았습니다.
아까 바르크가 쓰러진 나무를 들어 올릴 때
산처럼 넓어 보였던 그의 등을 떠올리며,
든든한 근육 위에 묻은 잿가루조차
벨라는 수줍게 바라보았습니다.
늘 그랬습니다.
그녀의 마음은 바르크가 이름을 부를 때마다
약초밭의 허브꽃처럼 은은한 향기를 뿜었습니다.
바르크가 무심하게 '벨라, 괜찮아?'하고 묻는 순간마다
볼이 따끈해지고 손은 어색하게 꼬였습니다.
조금 전 바르크가 잿더미를 밟고 다가올 때도,
벨라의 심장은 불타오르는 숯처럼 빨갛게 달아올랐습니다.
"그럼 모두 이동하자. 안내해. 바르크."
리나가 모두에게 손짓하며 말했습니다.
걸어가던 바르크가 옆에 가던 릴리에게 속삭였습니다.
"근데 벨라는 왜 나만 보면 눈을 피하는 거지?
나한테 뭐 화난 게 있는 건가?"
"아~뭐예요, 진짜~!!"
릴리가 무심한 듯 말하는 바르크의 팔을
한 대 살짝 때리며 볼멘소리로 말했습니다.
바르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벨라를 슬쩍 쳐다보고는 다시 쿵쿵거리며 걸어갔습니다.
불타버린 숲 어귀에는 아직 화염의 손길이 닿지 않은 커다란 나무가 서있었고,
그 아래에는 어린 풀들이 가득 자라고 있었습니다.
"자~~ 여기가 나의 보금자리다!"
일행들은 바르크의 '보금자리'라는 것을 보자마자
입이 떡 벌어졌습니다.
누울 곳도 모자라 보이는 수많은 잡동사니와
여기저기 널린 옷가지, 아무렇게나 놓인 무기들..
"와~이런 데서 어떻게 살지?"
"바르크 오빠.. 그동안 고생 많았구나.."
루칸과 릴리가 번갈아 탄식하며 말했습니다.
리나는 웃음도, 놀림도 허락하지 않으려는 듯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여기는 연기도 없고 잿더미도 없어.
이제 본격적으로 작전에 집중하자.
토리를 구출하려면 신속하게 움직여야 해.
이제 모두 앉아서 작전 회의를 시작한다.”
"그래, 여기 모여서 이야기하자."
바르크가 부지런히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벨라 언니~어서 와요~"
'보금자리'를 구석구석 둘러보고 있던 벨라가
릴리의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종종걸음으로 다가왔습니다.
중앙에 앉은 리나가 루칸에게 말했습니다.
"루칸, 블롯 지도 구해왔지?"
"당연하지! 이 루칸에게 불가능이란 없단 말이지! 짜잔!
여기 나의 정보망을 총동원해서 그려온
블롯의 내부 지도야.
루칸이 능청스럽게 지도를 펴 보였습니다.
"루칸, 최신 정보 브리핑해 줘."
리나의 말에 모두들 탁자 위에
펼쳐진 블롯의 지도를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정보에 따르면, 현재 블롯에는 외곽 초소마다
청설모 군단이 대거 포진되어 있고,
카르의 특수경호대 비늘이빨단의 경계도
더 촘촘해졌어.
그래서 도시의 위는 뚫기 어렵지만,
도시 밑의 하수구 통로가 상대적으로 빈약하지.
도시 외곽 진입로는 모두 막혔으니,
일단 도시 안으로 들어가 하수구를 통하면 토리가 갇혀있는 지하 실험실로 바로 갈 수 있어."
“우리는 수적으로 불리하니까 정면돌파는 불가능해.
놈들의 주의를 따돌리고 기습 침투를 성공해야 해.
여기 이 구역을 지키고 있는
청설모 군단이 숫자가 다소 적어.
여기가 우리의 목표가 될 거야.
문제는 비늘이빨단인데.. 이들은 계속 은밀히 이동하면서 경계를 서고 있어.
족제비 특유의 감각이 뛰어나
쉽게 따돌리긴 힘들 거야."
루칸이 짧게 한숨을 쉬며 정보 브리핑을 마쳤습니다.
잠잠히 듣고 있던 리나가 작전 계획을 말했습니다.
"좋아, 두 팀으로 나눈다.
1팀은 릴리와 루칸이 한 조가 되어서 움직인다.
릴리가 먼저 블롯 외곽의 큰 굴참나무 위에 있다가
신호를 하면 날아서 도시에 침투해.
도시의 높은 곳에서 순찰하는 족제비들을
보고 있다가 멀어지면 바로 신호해.
그러면 루칸이 은신을 해서 초소로 접근한 다음,
청설모 군단의 주의를 끌어서 기절시켜.
이곳은 병력이 몇 명 없으니까 루칸의 독침 한 방이면 다들 금방 정신을 잃을 거야.
그리고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곳으로 숨겨줘.
릴리는 계속 높은 곳에서 망을 보면서
누군가 접근하려고 하면 저격수 역할을 해줘.
그럼 2팀인 바르크와 벨라,
그리고 내가 신속하게 들어간다.
하수구로 통하는 이곳에서 1팀과 합류하자."
리나가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릴리가 방방 뛰며 외쳤습니다.
“내가 날아오르면 게임 끝이지!
근데, 혹시 족제비들에게 발각되면 어떻게 할 거예요?”
바르크가 미소를 지으며 묵직한 해머를 들어 올렸다.
“내가 잡는다. 내 근육은 장식이 아니지.”
벨라는 회의 중에 바르크가 입을 열 때마다
허브잎을 괜히 뒤적이거나,
손톱을 조용히 만지작거렸습니다.
리나가 깊은 눈빛으로 마지막에 강조했습니다.
"벨라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치유 약초를 많이 준비해 줘.
이제 대기하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바로 작전 개시한다."
작전 회의가 끝난 뒤, 모두 벨라가 싸 온 도시락과
도토리빵을 나눠 먹으며 삼삼오오 모여 앉았습니다.
릴리는 무심코 바르크 옆에 앉으려다,
벨라를 한 번 슬쩍 바라보고는
얼른 자리를 비켜주었습니다.
바르크가 옆에 살며시 앉은
벨라에게 넉살 좋게 말을 걸었습니다.
“벨라, 몸은 괜찮은가?
아까 안색이 별로 안 좋던데.”
벨라가 고개를 떨구고 손을 감쌌습니다.
“아… 그게, 약초 때문이야.
오늘 아침에.. 감초랑 마가목 섞은..
약초차 마시고 왔더니 그렇네.
별거 아니야, 신경 쓰지 마.”
벨라는 힐끔 바르크의 손을 보다가
손등에 난 작은 상처를 알아차리고는,
가방에서 약초 연고를 꺼내서 발라주었습니다.
바르크가 벨라의 어깨에 살짝 손을 올리고
장난치듯 말했습니다.
“벨라는 이런 거 항상 잘 챙긴다.
그러고 보니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했었다.
너 없으면 내가 이렇게 오래 못 버텼다.
고맙다. 벨라.”
벨라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하고,
두 볼을 붉힌 채 손등만 바라봤습니다.
둘을 지켜보던 릴리가 조용히 루칸에게 속삭였습니다.
“어머, 어머. 벨라 언니 두 볼 빨개지는 것 좀 봐.”
루칸도 릴리에게 속삭이며 웃었습니다.
“난 바르크 형이 언제쯤 눈치챌지, 그게 더 궁금해.”
“바르크가 눈치는 없지만,
진심은 언제나 통하는 법이지.
언젠가는, 모두의 마음이 더 선명해질 거야.”
갑자기 등 뒤에서 들리는 리나의 목소리에,
루칸과 릴리는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어느새 밤이 저물고, 달빛이 동그란 눈동자처럼
머리 위에 걸렸습니다.
바람이 불어오자, 저 멀리 불타버린 숲의 재가
허공에 수많은 검은 나비들처럼 흩어졌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재와 함께 과거의 기억,
그리고 슬픔도 함께 날아오르는 것만 같았습니다.
불타버린 나무의 끝에 애처롭게 매달린 나뭇잎도
밤공기 속에 고요히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나뭇잎은 그렇게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라는 소망처럼
끊임없이 자신을 흔들었습니다.
다섯 명의 자경단이 달빛과 별빛 아래 모두 모였습니다.
벨라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바르크의 등 너머에 조용히 시선을 두었습니다.
"다치지 마, 바르크."
속삭이듯 뒤에서 들려오는 벨라의 말에
바르크가 뒤돌아보며 싱긋 웃었습니다.
불타버린 숲은 잿더미 속에서도 조용히 살아있었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 역시
작은 틈사이로 붉게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우린 이제 토리를 구출하러 간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누구도 뒤처지지 않는 거야."
리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우리, 지금부터는 절대 뒤돌아보지 않는다.
숲의 심장, 그리고 토리.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찾을 거야.”
이윽고, 다섯 실루엣이 잿더미 대지 위로
힘차게 달려 나갔습니다.
숲의 어둠과 저 멀리 도시에
번지는 차가운 빛이 대조되면서
어딘가 으스스한 안개가
온 땅을 뒤덮었습니다.
그 사이를 헤치며 다섯 동료는 땅을 밟고,
어둠을 딛고,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들의 실루엣 뒤로,
불타버린 숲과 어두운 밤이
마치 삶과 죽음의 경계처럼 흐릿한 리듬이 되어
재처럼 공중으로 흩날리고 있었습니다.
(다음 편 '자경단을 만나다'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