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기 위해 책을 폅니다

작가가 숨겨둔 다정한 함정 속으로

by 아르망

책을 펼치면

문장의 가로수들

줄지어 서서

이쪽이라고 손짓하니,


의심 없는 이방인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간을 맡긴다.


그러다

어느 페이지의 갓길

문득,

걸음을 멈춘다.


등 돌린 문장 하나가

정해진 길을 버리고

말없이 숲으로 들어갔기에.


지금 몇 시인지

방에 불은 켜져 있는지

창밖의 빗소리가 언제 멎었는지

생각하다

생각하려다

생각이 닿지 않는다.


지금 여기는 어디쯤인가.


이상하게

발걸음은 점점 가벼워진다.


억지로 가야만 했던 길을

비로소 내려놓은 것 같아서.


문득,

피식 웃음이 난다.


작가는 처음부터 나를

정해진 목적지에 데려갈 마음이 없었으니.


다만 이전의 나를 그만 놓게 하려고,

어디에도 닿지 않는

그 자유로운 헤맴 속에

머물게 하려고,

이토록 아름다운 미로를 지었을 것이다.


이것은 펜 끝으로 파놓은

가장 다정한 함정.


낡은 지도는 버려야만

내 안의 잠든 나침반이

비로소 파르르,

깨어난다는 걸 알기에


기꺼이 나는

이 눈부신 방황을

서둘러 끝내지 않는다.


글자가 없는

저 깊고 푸른 여백 쪽으로

발걸음이 자꾸만 기운다.


잘 닦인 길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 것

길이 끊긴 틈에서

작게

피어 있는 무언가를

그저 오래,

아주 오래

들여다보고 싶어서.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

다시 분주한 현실의 숲에 서 있지만


발밑에는 서성이던 걸음들이

다져놓은,

작지만 단단한 오솔길 하나.



예전에는 책을 읽는 이유가 '길을 찾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답을 얻고, 지름길을 배우고, 반듯한 지도를 손에 쥐고 싶었지요.


하지만 이제 저는 '길을 잃기 위해' 책을 펼칩니다.

문장의 숲에서 길을 잃고 멈춰 섰을 때,

비로소 내가 쥐고 있던 낡은 지도를 내려놓을 용기가 생겨났거든요.


그 막막하고도 자유로운 여백 위에서야

남들의 속도가 아닌, 나만의 걸음걸이를 되찾을 수 있었지요.


이제 길을 잃는다는 건

꽤나 근사한 일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길을 잃었다고 느낄 때가,

내가 나에게 가장 가까워진 순간일지도 모르니까요.


길은 언제나
걸어가는 발밑에서,
아주 조용히 자라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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