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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보련 Jun 30. 2021

내 오람까?

- 훅 들어가기와 살곰이 다가가기 [가까운 말들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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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말들01]

우리가 쓰는 모든 말은 방언입니다. 그래서 우리 곁에 가장 가까이 있는 말은 곧 방언입니다. 그 말에서 느껴지는 온기, 향기, 열기를 짧은 글 속에 담아봤습니다. 우리 삶의 힘이 될 수 있는 말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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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사님, 청도 오자구요? 선생님 청도에 오시려고요?

“내가 중국 가는 거 어떻게 알았어? 근데 산동성이긴 하지만 제남 가는 건데?”

“청도로 꼿꼬지 옵소. 내 꽃다발 들고 고철 짠에 마중 가겠슴다. 청도로 바로 오세요. 제가 꽃다발 들고 고속철도 역에 마중 갈게요.


해를 넘길 때마다 모두가 같이 나이를 먹는 것일 텐데 어느 순간부터 어제의 제자가 오늘의 친구가 되어간다. 선생이 늙어가는 속도보다 제자가 어른이 되어가는 속도가 빠른 탓이리라. 특히 엄마가 된 제자들은 더 그래서 몰라보게 자란 아이 만큼이나 훌쩍 어른이 되어 거의 친구처럼 맞먹는다. 아니, 그저 과거에는 뭐라도 가르쳐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지만 이제는 소소한 삶을 같이 나눠도 되는 상황이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여러 번 가본 칭다오지만 늘 말 한마디 안 통해 늘 헤매기만 하는 선생이 걱정되었는지 열 일 제쳐 두고 마중을 나오겠다는 마음 씀씀이가 고맙다. 거의 맞먹자는 말투인데도 말이다. 메신저 대화를 끝내고 나니 기억의 시계는 새삼스레 과거로 돌아간다. 이 친구가 내게 오던 그 시절로.


“도사님, 내 오람까? 선생님 저 가도 될까요?”


이 제자에게 들은 첫마디는 이랬다. 중국에서 석사를 마치고 칭다오의 대학에서 교수로 지내다 온 상황이라 조금은 나이가 든 학생인데 전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첫 마디가 이랬다. 산에서 흰 수염을 기르고 있는 상황도 아닌데 도사라 불린 것도 의아하지만 ‘내 오람까’는 도통 모르겠다.


“네? 오 선생 맞죠? 그런데 무슨 말이죠?”

“제 말이 아이 알림까? 도사님께서 보자 해서 아이 바쁘시무 내 가자해서 그럼다. 제 말이 이해 안 되세요? 선생님께서 보자고 하셔서 (선생님이) 안 바쁘시면 제가 가려고 그럽니다.

“아, 오세요. 지금?”

“네, 오라시무 데깍 가겠슴다. 네, 오라고 하시면 바로 가겠습니다.


친구들에게 하는 ‘밥 한번 먹자.’가 학교의 제자들에게는 ‘언제 한번 보자.’라는 말로 바뀌어 쓰인다. 대학원 답사 때 우연히 마주쳐 얘기를 나누다 ‘언제 한번 봅시다.’로 끝을 맺었는데 이 친구는 그 ‘언제’를 오늘로 잡았나 보다. 목소리의 톤은 높은데 말투는 한없이 공손하다. 뭔가 어려운 부탁을 하려고 그러나?


“그런데 내가 왜 도산가요?”

“다오스가 도사 맞잼까? 쯔다오하는 라오스니 도사 맞슴다. 다오스((dǎoshī))가 도사(指導) 맞지 않습니까? 쯔다오(zhǐdǎo, 指導)하는 라오스(lǎoshī, 老師)니 도사가 맞습니다.

“지도교수란 말인가요? 아, 지도하는 노사. 내가 그리 늙은 선생은 아닌데?”


연변 지역의 말투와 중국어, 게다가 갓 배우기 시작한 듯한 서울말이 어우러져서 ‘알아 못 들을’ 말이 많다. ‘아이 알림까?’는 ‘알아지지 않습니까?’하는 피동 표현이었던 듯하다. 중국어에 쓰이는 ‘라오(老)’는 늙은이라는 뜻이 아닌 존경의 뜻이니 노인 취급한다고 탓할 일도 아니다. 아니, 활발한 그 말투와는 다르게 표정이나 몸가짐이 지나칠 정도로 조심스럽다.


도사? 지도교수? 그저 선생이나 교수가 아닌 지도교수? 대학원 신입생들은 입학 초에 무작위로 임시 지도교수를 배정하니 내 지도 학생으로 배정되었나 확인해 보니 아니다. 게다가 신입생도 아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사정이 이해가 된다. 지도교수를 바꾸려 하는데 그게 여러 가지로 꽤 조심스럽기도 한 일이니 학생이 걱정하는 것이 헤아려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 말이 너무도 예쁘다. ‘내 오람까?’라는 말이 곱씹어보면 볼수록 예쁘다. ‘나한테 오라 하십니까?’란 말이다. 나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전화를 걸자마자 자기를 오라고 하시냐고 물었던 것이다. 전화를 끊자마자 연구실 문을 노크한 것을 보면 문 앞에서 전화를 건 듯하다.


통상적으로는 ‘선생님, 저 지금 가도 돼요?’라는 말이 나와야 한다. 방문하는 사람이 주어가 돼서 서술어 ‘가다’를 써야 한다. 그런데 주어를 ‘도사님’으로 하고 서술어를 ‘오라 하다’로 했다. 가야 할 사람, 그리고 가려고 하는 것은 자신이지만 그 결정은 자신이 아닌 상대에게 하라는 말이다. 연변 지역 혹은 그 모태가 된 육진 지역의 말투이지만 생각해 볼 거리를 여럿 던지는 표현이다.


가끔씩 무례한 전화와 방문을 받는다. 연구실에 전화가 와서 받으면 ‘지금 연구실에 계시네요?’라는 말과 함께 툭 끊어지더니 금세 연구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린다. 대개는 억지로 책을 떠맡기러 온 출판사 직원이지만 동료 교수나 학생 중에도 이런 이가 있다. ‘다짜고짜’란 말, 혹은 요즘 많이 쓰이는 ‘훅’이란 말이 어울릴 만한 상황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늘 어렵다. 누군가와 인간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서로의 삶에 일정 정도 들어간다는 것, 다짜고짜 들어가면 깨어지고 훅 들어가면 밀려난다. 그 속도, 그 강도를 조절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내 오람까?’란 말의 함의를 떠올리면 깨지거나 밀려날 일이 없을 듯하다. ‘내 오람까?’란 말에 담겨 있는 긴 뜻은 이렇다.


‘나는 네게 다가가고 싶어. 그런데 너의 마음은 어떤지 모르겠어. 나는 이미 준비가 다 돼 있어. 결정은 네가 해. 나는 네 결정을 따를 거야.’


훅, 혹은 다짜고짜가 아니라면? 제주도 사람들은 사ᆞ갈짜기, 충청도 사람들은 살곰이, 전라도 사람들은 살포시, 경기도 사람들은 살며시 다가간다. 비슷한 부류의 단어이지만 ‘가만히, 슬그머니, 슬쩍, 몰래’와는 어감이 사뭇 다르다. ‘가만히’는 ‘냅 둬’와 어울릴 듯하고 ‘슬그머니, 슬쩍, 몰래’는 왠지 도둑질과 맥이 닿는다. ‘내 오람까?’는 사ᆞ갈짜기, 살곰이, 살포시, 살며시 관계를 맺어가는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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