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좋은 성적을 받는 대신 우리는 꿈을 잃는 거야
"행복이란 건 사람들에 따라 달라. 친구들과 함께 놀러 갈 때, 취미생활을 할 때. 그런 것들로도 행복을 얻을 수는 있지."
"…"
남자의 말에도 소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이 남자를 찾아온 건 모두가 다 알고 있는 행복의 뜻을 알기 위해서가 아닌,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서였다.
소녀는 이미 알고 있는 행복 이야기로 시간 낭비할 여유가 없었다.
"저기…"
"아, 물론 너 같은 학생에겐 행복보다 성적이 더 중요하겠지, 안 그래? 지금 이 순간에도 네 친구들은 널 제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 거야."
그 말에 소녀는 입을 다물고 다시 고개를 숙였고, 남자는 그런 소녀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공부하느라 밤을 새운 것인지 졸린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도 품에는 노트 한 권을 소중하게 안고 있는 아이.
"너는 열등생으로 떨어질 위험이 있나 보네. 이 뒷골목까지 찾아오는 아이들은 세상에게 버려지고 싶지 않은 아이들뿐이니깐."
"…"
남자의 말에 소녀는 아무 말 없이 있기만 했고, 그 태도로 남자는 소녀에게 무언의 긍정을 들었다.
언제부턴가 이 세상은 사람의 재능보다 우수한 성적은 로 사람을 평가하기 시작했다. 우수한 성적을 가진 아 이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높은 자리에 설 수 있는 기회를 가졌지만 열등한 성적을 가진 학생은 사람 취급을 받는 것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평생 밑바닥에서 살아갈지도 모르는 위험을 가지게 되었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기에, 학생들은 성적에 자신의 인생을 걸고 있었다.
그러든가 말든가 남자는 계속 웃으면서 제 이야기를 계속해갔다.
"오래전에는 사람들이 각자 타고난 재능으로 빛을 내 던 시절이 있었대. 그런 세상이 언제부터 이렇게 망가져 버린 걸까?"
"모르겠어요."
"넌 모르겠지만 원래 사람은 다 그런 거야. 제 뒤에 있던 사람이 세 걸음 다가오면 밀쳐서라도 다섯 걸음 물러나게 만들거든."
남자가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소녀의 머릿속은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번에도 성적이 더 떨어진다면 나는...'
좋지 않은 생각이 부풀려져 소녀를 집어삼키기 직전, 남자가 소녀의 눈앞에 종이를 불쑥 내밀어 소녀의 생각을 방해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성적 걱정은 접어둬, 네가 날 찾아온 이상 네 성적은 쭉쭉 올라갈 거니깐."
"정말요?"
"그 대신 조건이 있어."
소녀가 처음으로 남자의 눈을 똑바로 보자 남자는 의미 심장한 말을 남겼다.
"너의 재능을 나에게 파는 거야."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던 소녀의 눈이 일순간 당황으로 물들여졌다. 방금 뭐라고 한 거지?
"…네?"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소녀가 되묻자 남자는 소녀의 품에 있던 노트를 빼내 소녀의 눈앞에 펼쳐 보았다.
"자, 넌 그림을 잘 그리잖아. 다른 아이들과 달리 네 그림 실력은 천재적인 재능이야."
"아…"
"난 너의 재능이 마음에 들어, 그러니 나에게 재능을 팔면 넌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을 거야."
남자는 소녀에게 노트를 돌려주었고, 소녀는 조용히 그 노트를 한 장 한 장 넘겨 눈에 담았다. 그 안에는 공부에 지칠 때마다 문제집을 닫고 좋아하는 것들과 예쁜 배경을 연필 한 자루로 그리면서 즐거워했던 과거가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어때, 좋은 제안이지?"
"그게..."
소녀는 망설였다. 좋은 성적을 받는 건 좋은 일이었지 만 그림 그리는 시간은 소녀에게 무엇보다 바꿀 수 없는, 가장 행복하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소녀의 재능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소녀의 빛나는 재능을 보지 않았다. 오직 성적의 등급이나 점수만을 바라보았고, 소녀에게 화가의 꿈을 빼앗아 버렸다. 오래전의 일이었다.
소녀는 선택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종이에 서명을 했다.
"제 재능을 팔게요."
소녀의 말에 남자는 종이를 가져간 다음 소녀의 손을 맞잡았다. 남자의 웃음은 그 무엇보다도 환했다.
"잘 생각했어! 자, 이제 가져갈게."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소녀의 마음 깊이 숨겨져 있던 무언가가 스르르 사라졌다. 깊은 열망과 꿈, 이제 그림을 그리며 즐거워했던 소녀의 마음은 남자의 것이 되었다.
"이제 넌 좋은 성적을 가질 수 있을 거야."
다정하게 웃어 주는 남자와 달리 소녀의 표정은 지워진 것처럼 무표정했다. 방금 전까지 소녀가 가지고 있던 무언가의 반짝거림은 사라져 있었다.
소녀는 자신이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온 것인지도 잊어버린 채 소중히 아끼던 노트를 두고 떠나버렸다.
소녀가 가고 난 뒤, 남자는 노트를 조심스럽게 닫아 커튼에 가려져 있던 책꽂이에 꽃아 넣었다.
그의 책장은 반짝이는 물건으로 채워져 있었다. 서툴지 만 즐겁게 딴 목도리, 부모님 몰래 쓴 소설, 아름다운 꿈이 담긴 카메라. 그 물건들은 모두 아이들이 성적과 맞바꾼 재능이자, 어른들에 의해 빛을 보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린 꿈이었다.
그 책장을 바라보는 남자는
또 한 명의 아이가 세상에 의해 꿈을 잃게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조용히 슬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