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께 바치는 책 -
<아버지의 해방일지> - 정지아(창비)
빨치산 딸이라는 천형에 가난까지 물려받은 외동딸이, '나 잘났다고 뻗대며 살았던 지난 세월에 대한 통렬한 반성'으로 쓴 2022년 9월에 나온 책이다. 아버지 고상욱은 전직 빨치산이며 20년 가까운 감옥살이를 했다. 어머니와는 여순사건 직후 입산하였고, 둘은 재혼하여 딸 고아리를 낳았다. 작가의 말을 보니 이 책은 분명 저자 자신의 이야기다. 1965년생, 나와도 비슷한 연배이어서 '연좌제' 등 저자의 신분 관련이나 자라난 환경에 대한 이해가 쉽다. 평생 아버지에 대한 원망만 하고 살았던 딸이 들려주는 그녀의 가족사가 애처롭고 '인간'적이다. 배경이 전라도 구례여서 그런지 구수한 사투리가 정겹다. 때로는 이해하기 어려워 문장을 여러 번 곱씹는 행위로 오히려 입말의 감칠맛을 느낄 수 있었다. 읽는 내내 내 아버지를 투영하면서 추억이 새록새록 오르락내리락 반복했다. 아, 아버지와의, 어머니와의 세월이 눈물 나도록 그리운 시간이다.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한 일생의 삶을 마감했다. 딸이 보기에는 너무 진지해서 웃겼던 집안이었다. 사외주의자답게 의식만 앞선 농부인 아버지는 국졸에다 농사엔 젬병이었고, 어머니와 더불어 물정 모르는 유물론자였다. 노동절 새벽에 순천의 종합병원에서 아버지는 그렇게 82세의 일기를 마쳤다. 장례식장의 공동 사장 3명 중 한 명인 황 사장은 사회주의자이며 여순사건 직후 사망한 황수길의 아들이다. 전기고문 후유증으로 사시였던 아버지는 영정사진에서도 단호한 모습인데, 병원에서 임신 불가 판정을 받았지만 최 한의사가 준 약을 먹고 40세의 엄마에게서 나를 낳을 수 있었다. 아버지 영정사진은 작년에 아버지를 삼촌으로 모셨다는 민노당원 박동식 씨가 찍은 것이다.
아버지는 작은아버지의 원수였다. 집안이 망하고 자신이 국민학교도 못 나온 것 하며 할아버지가 군인 손에 죽은 것 모두 아버지 탓으로 생각하고 있다. 중앙 국민학교 35회 졸업생인 박한우는 아버지와 제일 친한 동기동창이며 예편 후 교련 선생을 했고, 그의 형은 아버지의 빨치산 동료로 지리산에서 죽었다. 아버지는 보증까지 여러 번 서는 바람에 날려 먹은 돈도 꽤 되며 나이게까지 약간의 빚이 대물림되었다. 하루에 소주를 세 병씩 마신 아버지는 고된 노동을 연장하는 일종의 진통제로 술을 먹었다. 나름 혁명가였지만 세상 일엔 젬병이었고 추레한 노인들 중 한 명에 불과한, 치매까지 걸린 그런 노인이었다.
어릴 때 너무나 친하게 지낸 큰집 길수 오빠는 지금 위암 말기이다. 빨갱이 작은아버지(내 아버지) 탓에 육사에 합격하고도 입학을 못 했다. 군대 제대 후부터 멀어진 그는 연좌제가 풀리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지만 이제는 자신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인생의 마지막 조문을 하고 있는 셈이다. 사촌들도 도착하여 상복을 입고, 떡집 언니는 노련하게 조문 상차림을 준비한다. 아버지 덕분에 암내를 수술하고 결혼한 장영자도 오고, 대여섯 살 위이지만 내 조카인 오촌 조카 경희도 왔다.
9살이었던 작은아버지는 학교에서 잘났다고 생각한 아버지를 외지 군인들에게 자랑했을 뿐인데, 그로 인해 1948년 반내골에서 할아버지가 그들에게 죽었다. 작은아버지는 그때부터 평생 아버지를 원수로 여겼다. 오거리 슈퍼의 열일곱, 열여덟 쯤 되고 고교를 중퇴한 손녀는 아버지와 담배 친구였단다. 엄마가 베트남 출신인 그녀는 검정고시 붙으면 아버지가 술을 사준다고 했으며, 지금은 미용사 자격증을 준비 중인데 아버지가 자기 머리로 연습하라고 했다며 눈물을 훔친다. 20여 명 남짓 전직 빨치산들, 나와 동문인 윤학수도 왔다.
박사논문과 학술서 한 권을 출간한 이후로 아버지는 나에게 내색하지 않고 동네방네 돌아다니면서 자랑하고 술을 사기 바빴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비아냥거렸다. 아버지는 중매로 인한 결혼식이 끝나기도 전에 도망쳤고, 그때의 처제도 왔다. 아버지와도 절친 동무였던 어머니의 전 남편 윤재는 남부군 소속이었고 낙동강 전선에서 죽었다. 어머니의 옛 시동생도 장례식장을 찾았다. 아버지에 의해 죽지 않고 살아난 '순경' 김상욱은 아버지 출감 후에도 찾아오고 때만 되면 배 상자 같은 선물도 보내곤 했다. 박한우는 십수 차례나 사람들을 장례식장으로 데려온다. 부모의 은사이며 중매까지 하나 소성철 선생의 장남도 모습을 비춘다. 아버지는 감옥에서 서방파 일인자 혹은 이인자와 감옥살이를 같이 한 적이 있고 '무등산 타잔'도 잠깐이나마 함께했다고 말했다.
상이용사가 가져온 아버지와 젊었을 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니 열댓 살의 아버지는 사시가 아닌 눈으로 정면을 바라본다. 네 살 때 내겐 없고 아버지에게만 있을 걸 본 순간 나는 아버지를 잃었다! 이데올로기나 국가만이 아닌 이유로 아버지를 잃은 것이었다. 아버지는 나의 전부였었는데. 고3 때에는 소설책을 읽다가 아버지가 낫으로 책 귀퉁이를 베며 화를 낸 기억이 난다. 빨치산 딸로 살게 한 나에게 사과는 안 하고 학교 공부 소홀히 한다고 분노한 것이다. 그때 나는 가출을 시도했고, 멀리 못 가 작은아버지를 만나 집으로 복귀한다. 그런 작은아버지가 비로소 염을 할 때 왔다!
대학 시절 8년 만난 선배는 판사가 꿈이었다. 아버지는 그를 놓아주라고 했지만 나는 오기로 그를 더 적극적으로 만났다. 결국 판사는 포기하고 변호사가 된 그와 결혼식 하기 전날, 그의 아버지는 식칼을 자신의 목에 대며 자기와 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결국 결혼식은 포기, 취소했다. 1980년 8월, 6년 수감 중에 병보석으로 감옥을 출소한 아버지를 고 1인 나는 어색하게 대면했다. 어릴 때는 그렇게도 좋아했던 아버지였는데, 끝내 아버지와의 친밀감은 회복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얼마나 서운했을까!
음치였던 아버지에게 처음 배운 노래가 '클레멘타인'이었다. 그 노래의 배경지식을 알면 제대로 부를 수 없는 노래다. 딸은 잃은 아버지의 마음, 왜 아버지는 그 노래를 처음 내게 가르쳤을까. 아버지와 베란다에서 같이 피운 담배맛은 내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담배맛이었다. 나보다는 훨씬 훌륭한 아버지의 자식이 학수였다. 아버지를 화장했다. 천 개의 얼굴을 가진 아버지는 그렇게 한 줌의 재가 되었다. 유골함을 안고 작은아버지는 통곡한다. 9살에 어긋난 형제가 70년이 지난 화해를 하는 셈인가.
아버지의 산이라고도 말한 수 있는 백운산에 수목장 하려던 계획을 바꾼다. 아버지는 겨우 4년 동안 빨치산으로 활동했지만 그런 결과는 평생, 아니 나에게까지 수십 년을 이어지게 했다. 아버지의 흔적이 남겨진 곳들을 돌아다니면서 아버지의 유골을 뿌린다. 그동안 무시하고 비아냥 거렸던 아버지의 삶을 되돌아보며 그 삶 전체를 숙고해 본다. 한 사람의 인생은 한 편의 영화로 만들기는 부족하다. 대하소설을 쓴다면 또 모르겠지만.
딸의 반성이 통렬하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부모가 생존해서는 깨닫지 못하는 것들을 우리는 부모 사후에나 깨닫고 반성한다. 그게 삶의 이치인가 보다. "사렘이 오죽하면 글겄냐."라는 말은 아버지의 18번이었다. 이제야 아버지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을 읽는 자식들, 부모를 잃은 자식들은 완벽하게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아버지, 너그러이 용서하시길..." 이 책은 아버지에게 바치는 책이다. 독자로서의 나도 그렇다. 다시 한번 부모님에게 용서를 빈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