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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ma Apr 23. 2023

[엄마, 안녕] 2. 덩굴 아래

3월의 어느 금요일 난 여수로 향했다.

오빠는 작년부터 여수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섬진강변에 벚꽃 필 때 놀러 오라고 했었다. 

여수로 가던 날은 서울에도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있었다. 가장 먼저 얼굴을 내민 매화와 노란 산수유는 물론 진달래, 개나리도 활짝 피어 있었고, 햇볕 잘 드는 곳에는 벚꽃도 피기 시작했다. 그러니 벚꽃만 보자면 굳이 여수를 갈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섬진강변에 벚꽃이 필 때 놀러 오라던 오빠의 말은 꼭 지켜야 할 약속 같았다.


오후 4시 42분 기차를 타야 했다. 일정을 마치고 용산역에 도착하니 3시가 조금 지났다. 용산역 안의 벤치에 앉아 기다리려고 했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용산역에 내 엉덩이 붙일 벤치는 없었다. 밖으로 나왔다. 영풍문고가 보였다. 너무 오랜만에 보는 서점이었다. 영풍문고 안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사람이 많지 않아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서점에 갔다고 해서 책을 읽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익숙한 책이 눈에 띄었다.

'불편한 편의점'.

병원에 있는 동안 엄마를 간병하면서 읽으려고  e북으로 샀지만 읽지 못했던 책이었다. 간병하면서 책을 읽을 수 있을 거라는 안이한 생각을 했던 거다. 병원에서도 못 읽고, 이후에도 읽지 못했던 '불편한 편의점'을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것도 최근의 일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책을 읽는다는 것조차 책감을 갖게 했었다. '불편한 편의점'을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들어 나는 책을 내려놓고 다른 곳으로 갔다. 그곳에 내 눈을 사로잡는 제목이 있었다.


'눈사람 자살사건'(최승호)


눈사람 자살 사건 - 최승호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이 문장에 홀려 책을 펼쳤다.


살아야 할 이유도 그렇다고 죽어야 할 이유도 없는 눈사람은 자살을 하려고 욕조 안에 누웠다. 그리고 뜨거운 물에 녹을지 찬 물에 녹을지 고민했다. 눈사람은 뜨거운 물을 틀었다.


눈사람은 뜨거운 물에 녹을 때 아프지는 않았을까?

눈사람이 아프지 않길 바랐다.

내가 기도할 수 있는 건 겨우 그것뿐이었다.




기찻길 옆으로도 꽃은 피었다. 노란 개나리가 활짝.

기차가 빠르게 달려, 스치듯 본 노란 개나리를 반가워할 새도 없이 먼지 덮인 거미줄처럼 생긴 덩굴들이 보였다. 그리고 거미줄 같은 덩굴 아래 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는 이제 연한 초록색 잎을 세상 밖으로 내밀고 있었다. 그 덩굴과 나무도 스쳐 지나서 더 이상 보지 못했지만 잔상이 계속 남았다.

몇 년 전 본 뉴스가 떠올랐다.

덩굴 외래종이 우리나라 온 산을 뒤덮고 있으며, 토종식물들은 햇볕을 못 받아 말라간다는 내용이었다.

그 덩굴도 작년 뜨거운 태양을 받으며 나무를 뒤덮고, 벽을 타고 오르며 열심히 자신의 영역을 넓혔겠지. 나무가 햇볕을 보지 못하게,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그러다가 지난겨울에 바싹 말라, 마른 가지만이 얼기설기 이어져 나무에 걸쳐져 있는 거겠지.

난 저 거미줄 같은 덩굴이 미워졌다.

그리고 연한 초록빛을 내며, 나무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이 대견하고 애틋하게 느껴졌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라는 상투적인 표현이 새롭게 다가왔다.

소생하다 - 죽었다가 또는 거의 죽어가던 상태에서 다시 살아나다. (다음 어학사전)


지난겨울의 한가운데에서 엄마는 떠났다. 마치 자신의 죽음을 새해까지 미루고 싶지 않은 듯 새해를 며칠 앞두고 서둘러 갔다.

난 어떻게 살아야 하지?

엄마가 돌아가신 후 가장 처음 든 생각이었다. 엄마가 내 삶의 목적이 아니었음에도 엄마가 떠난 후 난 너무 막막해졌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사람들은 나를 위로한다고 혼자 내버려 두지 않았고, 그럼 난 사람들과 함께 일상을 이야기하며 웃었다. 사람들한테 엄마의 죽음을 더는 얘기할 수 없었고, 사람들도 나를 배려해서 엄마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사람들이 부르면 어디든 갔다. 엄마와 함께 살다가 혼자 남게 된 집은 너무 컸고, 혼자 남은 집에서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 엄마가 살아계실 때도 엄마랑 시간을 늘 함께 보낸 것이 아니었는데도 혼자 남게 된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집에 혼자 있으면  티브이를 볼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없어서 평소 잘 듣지 않던 음악만 들었다. 그리고 혼자 울었다. 언니나 오빠를 만나서도 울지는 못했다. 서로서로 각자의 슬픔을 감당하고 있었고,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이 혼란스러운 마음을 어떻게 다잡아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꽃이 피기 시작했다.


봄에 피는 꽃을 좋아했었다. 맨 먼저 보이는 노란 산수유도, 달큼한 향을 바람에 실려 보내는 매화도, 하얀 목련의 몽우리도, 메마른 산에 듬성듬성 보이던 진달래도 좋아했다. 봄에 나무들이 내보이는 연한 초록잎새도 좋아했다. 그들을 보면서 늘 설렜고, 길을 걸으면서 그들을 보느라 부산스럽게 고개를 돌리고는 했다.

그런데, 엄마 죽음 이후의 이 봄을 어떻게 맞아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작년 10월, 엄마와 함께 여수에 갔었다. 그때도 엄마는 아팠지만 그것이 암이라고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평소에도 허리가 안 좋으니, 그저 허리가 안 좋은 줄 알았다. 그리고 오빠는 엄마와 나를 태우고 섬진강변을 드라이브했었다. 그때 벚나무가 길게 늘어선 길을 보며 오빠가 말했다.

'봄에 벚꽃이 피면 다시 와.'

엄마는

'좋지.'

라고 했었다.


그리고 벚꽃이 피고 있었다. 난 여전히 해답을 얻지 못했지만,  엄마랑 오빠랑 함께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난 3월 말 어느 금요일에 여수행 기차를 탔었다.

그리고 기차 안에서, 거미줄 같은 덩굴 아래 서 있는 나무를 보았다. 연한 초록빛을 내보이는 나무를.


난 아직 살아있어.


나무가 말하는 거 같았다. 죽음 같던 지난겨울을 잘 이겨내고 다시 잎을 내고 있다고 말하는 거 같았다. 다시 덩굴이 자신을 타고 올라 햇볕을 가려도 열심히 살아갈 거라고 말하는 것도 같았다. 나무 역시 살아야 할 이유도 죽어야 할 이유도 없겠지만.



거미줄 같은 덩굴 아래,

다시 나무가 있다.

다시 초록을 보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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