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금보다 조금 어린 시절부터 '미움', '밉다'라는 말을 좋아했어요. 밉다는건 불호도, 증오도, 혐오도, 배척도 아닌 그러니까 조금, 어쩌면 조금보단 더 많이 마음 상했다는 말인 것 같아서요. 마음 상하고 무언가 서운했지만, 그럼에도 절대로 애정이나 사랑은 버릴 수 없는 대상에게 하는 말이라서요.
그래서 내 이름이 아닌 닉네임을 써야하는 공간이나 환경에 가면 줄곧 '미운'이라는 별칭을 붙이곤 했습니다. 부정의 표현 치고는 제법 모양이 둥글고 부드럽기도 하고, 입으로 뱉어봐도 서글서글하니 예쁜 아이 같은 느낌이 드는게 마음에 들었어요. 어떻게 보면 성운, 적란운 같은 것처럼 구름을 뜻하는 말 같기도 하잖아요. 아름다운 구름.
'밉다'는 말을 사전에 검색해보면 모양이나 생김새,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고 거슬리는 것을 뜻한다고 나오는데요. '싫다'는 말은 밑도 끝도 없이 마음에 들지 아니하다고 나오더라고요. 싫다는건 정말 으으, 이유도 짚기 어려울만큼 그냥 치가 떨리고 꼴도 보기 싫은거라면 밉다는건 손끝의 거스러미처럼 아이 참, 신경쓰이고 안그랬으면 좋겠고 부디 다시금 매끈해졌으면 좋겠는 그런 마음인거 같아요.
누가 저에게 "너 정말 싫어."라고 말한다면 그 순간부터 마음 속에 주먹이 징징징 울리고 코가 찡해서 잠이 안오고 이유를 찾느라 공책 한 권을 다 쓰게 될거에요. 그렇지만 "너 미워!"라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조금 쪼그라들어서 비맞은 강아지 표정을 하고 "내가 미안해, 이제 안그럴게."라며 다시 나를 사랑해주란 표현을 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래서 마음 깊이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조금 속상하게 하거나 핀트가 조금 틀어지는 날에는 왜이렇게 미운 다섯살처럼 굴까 생각하면서 뾰족하게 나갈 말을 살살 깎아내고, 모나지기 일보 직전인 마음을 둥글게 다듬어왔어요. 뿐만 아니라 웬만하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싫어하진 말고, 너무나 힘들 때 미워만 하자고 생각도 했는데요.
부딪히는 것이 일상인 날들을 살아가다보니 이제는 미워 죽겠는 순간들이 찾아오더라고요. 미운 것도 적당히 미워야지, 너무나 미워서 더이상 못봐주겠는 사람들이 생기고요. 회사에서 매일 같이 나를 열받게 하고, 스트레스 받게 하는 사람에 대한 분노를 혼자서 부글부글 끓이다가, 넘쳐버릴때 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마구 퍼내곤 하거든요.
그 때마다 저는 문장마다 밉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저주에 걸린 사람처럼 '미워, 미워.' 합니다. 이렇게 한것도 밉고, 이런 말도 너무나 밉고, 이런 결정을 한 것도 미워. 미워 죽겠어.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싫다는 말을 하면 죽는 병에 걸린 사람처럼 절대로 싫다는 말은 못해요.
단어의 첫 소리가 특정 자음으로 시작할 수 없어 탈락하는 두음법칙처럼, '밉다'와 '싫다' 사이에 둔 저만의 언어 법칙이 끈질기게도 작용하나 봅니다. 아무리 그래도 상식 선 안의 사람은 싫어하지 말자, 싫어할 도리가 없다. 그런 생각이 저를 바보같은 아량쟁이로 만듭니다.
여기까지 써두고 잠에 든 뒤, 조금은 뻣뻣해진 마음으로 다시 아침을 맞았는데요. '회사 가기 싫어..'를 속으로 중얼중얼 되뇌며 억지로 눈을 떠 나갈 준비를 하는데 별안간 엄마에게 전화가 오더라고요. 아침에는 전화할 일이 없어 무슨 일인가 싶어 전화를 받으니 엄마가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사랑하는 딸. 엄마가 어제 밤에 한참 생각해봤는데, 그 사람들을 너무 미워하지 않는게 좋을 것 같아. 비록 스트레스를 주기도 하고, 힘들게 하기도 하지만 언젠가는 너를 인정해줬고 선택해줬고, 기회를 주고 이끌어줬던 사람들이잖아. 너의 뛰어난 능력들도 누군가 알아봐주지 않았다면 빛을 보지 못했을 수 있는데 그 사람들은 너를 찾았잖아.
사랑하진 않아도 되니 그냥, 저 사람은 저렇구나.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구나 생각하고 너를 자꾸만 깎지마. 자꾸만 그 생각과 감정에 메여서 힘들어 하지마. 엄마는 네가 넓은 사람이 되면 좋겠어. 좋은 하루 보내.
응, 응, 맞아. 엄마도 좋은 하루 보내. 하고 대답한 저는 잠시간 굳어있다가 다시 분주히 움직여 여느 날처럼 회사로 향했습니다. 매일 같이 끼고 다니던 묵주팔찌가 자는 사이 끊어져 휑해져버린 손목을 털레털레 흔들면서요.
근래 이상하게 자꾸만 어딘가 다치고 상처가 나질 않나, 일이 자꾸만 어그러지고 힘들어지질 않나, 살고 있는 곳에서도 문제가 생기질 않나, 심지어는 멀쩡하던 팔찌가 잠 자는 사이 끊어지질 않나. 부정에 가까운 일들이 짧은 텀으로 반복되기에 뒷목이 서늘한 느낌이 있었는데요.
어쩌면 오래도록 마음깊이 누군가를 미워한 탓에 그 칼이 쌓여 나에게 쏟아지듯 돌아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다 우연의 우연의 우연일테지만, 그렇게 생각하기로 합니다. 잘못한 것이 없는 나에게 불행이 모여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면, 사실은 큰 잘못을 한게 있을 확률이 높으니까요.
그래서 미움을 조금 덜고 버리고 깎고 흘리고 털기로 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오늘도 그 사람들이 또 나를 힘들게 하여 속으로는 밉다, 밉다를 염불 외듯 외웠거든요. 그래도 습관처럼 그러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으려 합니다. 남을 미워하는 나보다 나를 보살피는 내가 더 좋으니까. 나는 사랑이 많은 나를 사랑해서 이만큼 열심히 사는거니까 고단해도 애써서 다듬으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