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에게만 나쁜 사람이었을까?
나의 글은 괴로움에서 시작된다.
아동학대를 당하는 당시도 그랬지만
현재 선량한 평판과 지지를 받으며 평온한 여생을 보내고 있는 (새) 엄마로 인해
폭력에 의한 정신적 부담과 내적 갈등은 오롯이 피해자인 나에게 집중되는 듯하여 여전히 괴롭다.
그 녀는 왜 나에게만 나쁜 사람이었을까?
우선, 아동에 대한 정서적 학대와 방임은 폭력임을 정확히 해두자.
정신적 상처를 남기고 피해자의 삶에 다양한 측면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심리적 고통은 심각하고 지속적일 수도 있다.
우리 친가 식구들의 대부분은 새엄마는 원래 그런 것이라며 도무지 알아먹질 않아서 답답한 마음에 짚어둔다.
권력의 불균형을 기반으로 발생하는 선택적 폭력
가정 내 권력 구조에서 불균형은 존재한다. 아동은 육체적, 정서적, 경제적으로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한다. 그러한 자신의 우월성을 이용하여 선택적 대상에게 폭력이 행사하면서도, 사회적 관계에서는 선량하고 협조적인 모습을 보인다.
아동은 생존을 위해 부모의 사랑과 상호작용이 필수적이다. 그것들로부터 적대적으로 굶주려 있던 내 앞에서 그녀는 호의적인 관계에 놓인 어떤 이의 아이를 업고 사랑해 주기도 하고, 내게는 선사하지 않는 선물을 다른 아이에게 소포를 보내는 심부름을 시켰다. 자신이 낳은 자녀는 되지만 나는 안된다고 말도 안 되는 선을 긋고, 후에 중년이 훌쩍 넘은 자신은 쌍꺼풀 수술을 하고도 20살이 된 나에게는 쌍꺼풀 수술이 안 어울릴 것이라며 선을 그었다. 집에 놀러 온 동네 아줌마들 앞에서 내 이름으로 된 통장을 보이며 선량한 어머니 행세를 하고는 그 뒤로는 그 통장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부모의 권력을 이용하여 굶주린 아이의 필수재를 코앞에서 흔들어 약 올리듯 선택적으로 폭력을 가하였다. 나의 존재감은 훼손당했다.
심리적 불균형과 갈등
자신의 과거 트라우마나 정서적 결핍을 해결하지 못하고 선택적 대상에게 전가하는 방식으로 폭력을 행사하는데, 그 표출 대상은 취약하고 대항하기 어려운 사람이 되고 불안, 분노 등의 감정이 통제되지 않거나 자기애적 성향이나 자기 연민에 빠져 자신을 희생자로 보고 감정적 불안전성을 보인다.
그녀의 과거 트라우마는 자세히 들어본 적은 없다. 왜 미혼녀가 애 딸린 이혼남에게 시집온 지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양가 가족들이나 심지어 피해자인 나 앞에서 본인을 희생자로 둔갑시키면서 정서적 결핍을 호소했다.
왜 희생자인지 내용이 이렇다.
시어머니가 자기를 미워했다. 남편은 술에 찌들고 당뇨로 인해 여자로서 본능은 보호받지 못한다. 전처 자식은 이러이러해서 미워죽겠다. 그래서 본인은 불쌍하고 희생자이다.
자칭 희생자는 해결되지 않는 정서적 결핍을 선택적 대상인 나에게 주체하지 못하고 폭력을 행하였다. 화난 눈으로 제압하고 진절머리를 내며 소리치거나 아니면 아예 싸늘하게 없는 존재처럼 무시했다.
설거지를 하다가 흥분해서 젖은 고무장갑으로 아침에 자고 있는 내 따귀를 때리고 화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거나, "나는 너 때문에 지옥에 가도 어쩔 수 없어!"라고 포효하듯 소리치며 표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 아닌 다른 사람들과 얘기하거나 손님 앞에서 나를 대할 때 목소리 톤은 완전히 다르다.
정서적 학대의 조작적인 성향
가해자의 아동이 잘못했기 때문에 미움을 받는다는 정서적 조작을 통해 점점 더 아동은 자신이 문제라고 생각하게 되고 마음의 병은 깊어진다. 이는 가해자가 자신이 외부에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와 결합하여, 자신의 행동을 사회적으로 숨기려는 심리를 강화시켜 외부에서 폭력 상황을 알아차리기 힘들 수 있다.
당시 나는 학대라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원래 미움받고 소외당하는 존재인 줄 알았다. 폭력의 부당함을 인지하지 못하여 정서의 혼란과 존중감이 훼손되었다.
어릴 적, 미숙이라는 친구의 가족과 우리 가족이 매우 가까워 어른들과 아이들이 한집에 모여 자주 시간을 보내고 많은 것들을 함께 하였는데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언젠가 미숙이 엄마가 나를 식탁에 불러 앉혀놓고는 엄마는 할 만큼 하고 있고 좋은 엄마라는 요점의 이야기를 긴 시간동안 하셨다. 마음속으로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어린 나는 아니라고 말하지도 못했다.
또 중학교 1학년때 원하는 사람만 가정방문을 하겠다고 했다. 나는 막연히 SOS를 청하기로 마음먹었다. 체육과목 담당인 담임선생님이 나중에 체육실로 따로 불러 물으셨다. "지은이는 왜?" 무슨 이유로 가정방문을 신청한 것인지 물으셨는데, 달리 생각하는 것은 없었고 막연히 알아주고 도와달라는 심정이었다. 나는 "우리 엄마가 새엄마예요"라고 대답하고 다음날 집으로 선생님과 같이 하교를 했다.
엄마는 걱정 가득 담은 곰살맞은 말투로 처음부터 끝까지 '요즘 세상이 험해서 여자아이 키우는 입장에서 걱정이 너무 많다'는 이야기를 반복했다. 어찌나 스위트한 말투였는지 '아 저 말투 평소 나한테도 저렇게 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 20분 면담이 끝나고 선생님과 둘이서 집을 나왔는데, 선생님은 ' 너희 엄마 좋은 엄마야~"라고 하셨다.
그때 맥이 풀리며 의지의 싹이 말라버렸다. 그 뒤로는 무기력하기만 했다.
그 즘 아빠가 술 마시고 나를 증오하고 협박을 해도 다음날 학교 마치고 텅 빈 절망적인 마음으로 갈 곳은 집 말고는 없어 터덜터덜 들어오는데, 엄마는 내 앞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저거는 즈그 아빠가 그렇게 모질게 해도 꾸역꾸역 집에 들어오는 거 함 봐라. 참" 하며 한번 더 무너뜨렸지만 아빠나 엄마에게 아무런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무력해져만갔다.
자기 정당화와 방어기제
아동의 행동을 과도하게 부풀려 해석하거나 폭력을 행사한 것이 아동의 행동 때문이라고 정당화하고 폭력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치부함으로써 책임감을 회피하려 한다. 나아가 본인 스스로도 정당하게 행동하고 있다고 믿어버리는 인지적 왜곡이 올 수 있다.
내면의 죄책감과 폭력적 충동을 억 누르기 위한 방어기제로써 외부적으로는 선량하고 친절한 모습을 과장하여 드러낸다.
정서정 학대 그리고 방임과 함께 가장 많이 목격된 그녀의 모습은 정당화이다.
시댁 행사 준비는 엉덩이만 붙였다 하면 내 욕으로 시작되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을 때는 그나마 덜 했지만 수군수군 내 험담과 본인의 연민을 호소하는 것은 수십 년간 반복되어 자칫 내가 미움받을 만한 아이기때문에 당연하다고 생각될 지경이었다.
유치원에 다닐 시절(미숙이와 같은 유치원을 다녔는데, 그나마 유치원에 다닐 수 있어 감사하다), 크리스마스 때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아이들에 선물을 주시며 아이마다 구체적이면서 서로 다른 당부들을 하셨는데 각자 부모로부터 자기 아이에게 당부하고 싶은 내용들을 미리 받았던 모양이다. 내 차례가 되어 선물을 주시며 하시는 말씀이 "지은이는 엄마 아빠 말을 안 듣는다면서~, 이제 엄마 아빠 말 잘 듣자~"였다. 유치원 다니기 전부터 엄마 아빠는 나에게 정서적 교류를 제공하지 않았다. 4살짜리 아이를 집에 혼자 두고 데리고 다니지도 않았다. 주로 내 방에 우두커니 혼자 있었다. 간혹 엄마가 방문 앞을 지나가면서 내가 보이면 혼내는 말이 "또 멍청하게 혼자 앉아 있다!! 어이구! 콱!"였다. 나는 혼나기는 싫은데 혼나지 않으려면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궁지에 몰리는 기분이었다. 지금와서 하는 말이지만 아이가 뭔가 할 수 있도록 부모가 제공해야 하지 않나. 그 걸 왜 또 혼내냔 말이다.
아무튼, 두렵고 무서운 엄마 아빠의 말을 거역하는 것이라곤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그야말로 방치상태인 내게 거의 요구하지도 주지도 않았다. 나는 그때 '말을 안 듣는다는 것은 그냥 갖다 댄 이유구나'라고 느꼈다. 그녀의 정당화를 위해 나의 잘못은 강요되었고 확대되었다.
그 밖에 그녀가 말하는 나의 잘못은 후에 '상처받은 아이'편에서 하나씩 이야기하겠다.
강화
심리적 갈등과 권력의 불균형에 의해 나타난 선택적 폭력은 방어기제에 의해 조작되고 정당화되어 결국 패턴으로 반복된다.
아빠는 재혼한 아내로부터 두 번째 버림받음이 두려워서인지 초기에는 말과 행동 없이 엄마 눈치만 보다가 나중에는 눈을 감고 상황을 받아들여버렸다. 더 시간이 흘러서는 엄마 앞장에 서서 저주와 협박 등 아주 적극적인 폭력을 가하게 되었다. 엄마는 가장 중요한 사람에 의해 일차적인 정당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친가(시댁) 집안의 내면화된 폭력성으로 인해 대다수 가족은 암묵적으로 학대를 허용하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는데, 이 것으로 엄마의 정당성은 두 번째 지지를 받은 듯하다. 지금까지도 그 폭력의 허용은 유지되고 있는데 보수적인 경상도 사람들이라고는 하지만 참으로 가슴이 아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