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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죄송합니다"

스승의 날에 쓰는 반성문

by 청효당

5월 15일은 스승의 날이었다. 오십 수년 전 중학교 시절의 은사들을 모시고 사은행사를 한 친구 하나가 카톡에 올린 사진을 보았다. 스승은 말할 것도 없고 제자들 또한 백발의 노인들이어서 ‘세월의 무상함’을 새삼 느꼈다. 한편으로 그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스승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감사하는 마음을 유지하고 있는 친구들이 부럽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했다. 이날을 기념하여 신문에서는 관련 기사들이 실렸고 방송에서는 특집 프로그램들을 방영했다. KBS의 <한국인의 밥상>에서는 가정 사정으로 정규 학교를 다닐 수 없었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야학 교실을 열어 공부를 가르쳐준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런 고마운 선생님의 덕택으로 용기를 얻어 어려움을 헤쳐 나간 소녀들이 성장하여 해마다 잊지 않고 그 선생님을 찾아와서 그 시절을 회고하며 새삼 선생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는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게 만드는 이즈음의 현실을 비추어볼 때, 스승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참 교육의 상징이라고도 할 그런 선생님들의 모습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고두현 시인이 한국경제신문에 실은 글도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절집 곁방에 얹혀살던 고두현 시인은 중학교 1학년 때 체육 시간이 끝나갈 무렵 운동장에서 쓰러졌는데 영양실조 때문이었다. 이 사건 이후 고 시인의 집으로 ‘가정방문’(요즘도 이런 게 있는지 모르겠다)을 왔다가 집안 사정과 학자금이 밀린 사연을 알게 된 선생님은, 얼마 후 고두현 학생에게 돈이 든 봉투를 건네주었다. 사정을 전해 들은 선생님들이 월급에서 1%씩 떼어 마련한 것이었다. 담임선생님은 “고 박사! 장학생이 됐으니 더 열심히 하고 먹는 것도 잘 드시게”라며 반존댓말로 자존감을 높여줬다고 한다. 아마 지금도 어디에선가는 이런 ‘꿈의 불씨를 살려준’(고두현 시인의 표현임) 아름다운 스승과 제자 간의 미담이 있겠지만, 또 한 신문에는 정년 전 학교를 떠나는 교원들의 실태가 실려 있다.

2020-2024년 정년 전에 퇴직한 교원은 초등교사가 1만 5543명으로 가장 많았고, 중등교사 1만 2352명, 고등교사가 8,853명으로 모두 36,748명이라고 한다. 이런 증가추세는 2020년 6512명에서 작년에는 9,194명으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교사들의 ‘전직 러시’ 현상은 낮은 급여 등의 처우 문제뿐 아니라 ‘학생 학부모에 의한 교권 침해, 교육 환경 악화 등 복합적인 문제가 원인’이라고 한다. “우리 아이는 SKY에 보낼 건데 담임이 SKY 출신이 아니라 걱정된다”는 말을 들었다는 한 퇴직 교사의 이야기는 충격적이기도 하다.


나는 문과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했지만 교직과목을 이수하지 않았다. 인문학 전공자 중에는 졸업 후 교사로 진출하는 비중이 높아 교직과목 이수는 거의 필수적이라 할 일인데, 일찌감치 나는 교사의 길은 포기했기에 아예 교직과목을 이수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행히 졸업과 함께 기업에 취업이 되어(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70년대 후반은 우리 경제의 호황으로 취업이 비교적 수월했다) 교직과목 미이수에 대한 후회는 없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무모하고 어리석은 결정이었다. 내가 교사직을 포기한 것은 중학교 때의 경험이 그 원인이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6학년 1학기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정 형편이 급속도로 악화된 데다 중요한 시기에 입시 공부를 게을리한 탓에, 원하던 중학교에 진학을 못한 나는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말이 없는 아이였고 공부도 잘하지 못했다. 친하게 지내는 친구라야 같은 동네에 사는 아이 둘 뿐이었다. 그런 학교생활이 계속되다가 2학년 1학기 때 방황이 시작되었다. 2학년 담임선생이 싫었다. 선생의 모습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나는 그분이 아이들을 차별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반에 고급 공무원을 아버지로 둔 아이가 있었는데 유독 그 아이를 편애하는 것 같았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무렵 유독 소외감 같은 것에 민감하던 나의 과잉 판단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집이 멀어 학교까지 1시간 넘게 걸리던 나는 2학년 들어 지각을 하는 날이 몇 번 있었다. 어느 토요일 종례 때 담임선생님은 나를 지적하며 월요일에 지각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만일 또 지각할 것 같으면 아예 학교에 오지 말라”고 경고를 했다. 나는 월요일 등교를 서둘렀지만 학교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정문이 닫혀 있고 운동장에서는 조회가 열리고 있었다. 나는 토요일 담임선생님의 말이 생각났다. 그 길로 학교를 뒤로 하고 꼭 2주일을 무단 결석했다. 2주일 후 이 사실이 발각되고 정학에 이르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머니의 ‘눈물 어린 호소’로 겨우 징계가 완화되어 학교는 계속 다니게 되었다. 아마 그 무렵을 전후하여 나는 교사라는 직업에 대한 편견이 싹텄던 것 같다. 세월이 지나 그때 일을 떠올려보면 그 편견은 다분히 아전인수적인 것이었다. 당시의 내 마음 풍경을 감안하면 내 지나친 오해와 과장된 피해의식이 일으킨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리고 설령 내 생각이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것이었다면 오히려 자신은 좋은 교사가 되어야겠다는 각오 같은 것을 했어야 마땅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청소년 시절의 그런 경험 때문이었을까. 나는 초등학교에서 중학교에 이르기까지 특별히 기억나는 선생님이 거의 없다. 초등학교는 3학년에 서울로 전학을 온 탓에 연속성 같은 것이 없었고, 중학교 선생님 가운데는 앞서 말한 그런 사연 때문인지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없다(앞에서 말한 담임선생님의 모습도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비교적 기억이 또렷한 고등학교 시절의 몇몇 은사들의 경우도 그냥 덤덤할 뿐이다. 모습과 담당 과목 등 일반적인 인상들만 기억될 뿐 각별한 느낌은 없다. 사교성도 없고 내성적이던 내 성격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꼭 한 분 중학교 은사에 대해서만은 특별한 사연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이런 글을 쓰게 된 것도 그분을 떠올려서이다. 영어 선생님이었는데 내 결혼식 주례를 선 분이기도 한다. 이 선생님과는 다른 인연이 있기도 하다. 내 아버지는 2년인가 3년인가 짧은 기간 동안 고향의 철도역 촉탁 직원으로 재직하셨는데 당시 상사이던 분의 아들이 그 선생님이었다. 나는 이 사실을 어머니를 통해 나중에 알았다. 어머니도 내 징계 문제로 이곳저곳 알아보다가 우연히 알게 된 것 같았다. 선처를 받는 데 그분의 도움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중학교에서의 잠시 동안의 인연 이후 오랫동안 잊고 있던 선생님을 다시 뵌 것은 TV에서였다. 어떤 교양 프로그램에 출연한 선생님을 뵌 것이다. 그때는 선생님이 서울의 어느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실 때였다. 결혼 날이 정해지고 주례를 구하다가 문득 떠오른 분이 그 선생님이었다. 벌써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뒤였다. 우여곡절 끝에 학교로 선생님을 찾아가 주례를 부탁했고 선생님은 흔쾌히 주례를 서주셨다. 주례사에서 나와의 옛 인연을 말씀하시기도 했다. 나는 이 은사에게 큰 죄를 지었다. 결혼 후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오늘까지도 찾아뵙지를 못한 것이다. 아내는 결혼 후에도 한 동안을 지방에서 교사 생활을 하느라 주말부부로 지내야 했고, 그 후 1년도 채 되지 않아 해외 발령이 나면서 서둘러 출국하게 되었다. 물론 이 모든 건 다 변명이다. 어려울 때 도와주시고 주례까지 서 주신 은사에게 이렇게 무례한 제자가 어디 있겠는가. 선생님은 나를 얼마나 괘씸하게 생각하셨을까. 스승의 날에 떠올리는 부끄럽고 참담한 기억이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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