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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노년 단상 22

by 청효당

며칠 전 한 지인이 카톡방에서 전해 준 이야기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 지인과는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로 같은 직종의 동료 직원이었고, 나와는 입사 동기이지만 직종이 달라서 아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던 A라는 친구에 관한 소식이었다. 최근 지인이 어느 모임에서 A를 만났는데, ‘누구?’라고 묻는 듯한 애매한 표정으로 자신을 금방 알아보지 못하더라는 이야기였다. 고등학교 시절로부터 계산하면 무려 50년도 훨씬 넘는 인연이니 충격적인 일이었다. A는 치매를 앓고 있었다. 그날 모임에 A는 부인과 함께였는데 남편 보호를 위해 동반한 것이었다. A는 외국어에 각별한 재주가 있었다. 영어와 일어가 원어민을 뺨칠 수준이었다. 특히 일본어는 스스로 ‘KBS 방송보다 NHK 방송을 듣는 게 훨씬 편하다’고 할 정도로 탁월했다. 그런데 그날 모임에서 지인이 늘 그를 만날 때면 친근의 표시로 건네던 ‘오하요 고자이마스’라는 인사말조차 A는 선뜻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고 했다. 그의 총명함을 익히 잘 알고 있던 나로서는 지인의 그 소식이 믿기지 않을 만큼 충격이었다. 카톡방에 모인 사람들의 반응도 그랬다. 그리고 새삼 자신들의 나이를 떠올리며 그게 남의 일이 아닐 것임을 실감한다. 카톡방의 친구들은 그저 ‘우리 모두 건강하자’ 운운의 공허한 말들만 주고받았다. 그 공허한 말속에는 물론 쓸쓸함이 있었다.


카톡방을 나와 잠시 ‘나는 온전’한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사실 요 몇 년 사이 건강검진 결과표를 받아보면 빠지지 않고 ‘인지 기능 저하가 의심’되어 ‘추가적인 인지 기능 평가가 필요’하다는 소견이 기술되어 있다. 그런 평가가 나오게 되는 근거가 애매하긴 하다. 무슨 특별하고 전문적인 검사 결과에 따른 것이 아니라 질문서에 나와 있는 항목 몇 개에 대한 수검자의 자의적인 평가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이다. 질문 자체가 애매하고 포괄적이기도 해서 그냥 대충 그런 것 같다고 생각하고 표기하면 대개가 부정적인 평가가 나온다. 그런데 전문적인 치매 검사를 해본 사람들 중에도 ‘그 검사에 통과할 멀쩡한 사람이 몇이나 될지 모르겠다’며 검사의 까다로움을 불평하기도 한다. 물론 그건 아전인수 격의 변명일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내 기억력이나 인지 능력이 온전하다고 생각하는 건 결코 아니다. 어떤 사안에 부딪힐 때마다 ‘나 치매 아닐까?’하는 두려움을 (자주)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치매에 대한 두려움이나 경계 자체가 ‘아직은 치매까지는 아닐지 모른다’는 역설적인 안도감 같은 것을 애써 가져보기도 한다.


작년 가을 100세로 돌아가신 내 어머니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우려할 만큼의 치매 증세는 보이지 않았다. 아주 드물게, 환청을 들은 듯한 가벼운 섬망 증세가 있긴 했지만 마지막까지 아주 오랜 예전 일도 또렷이 기억하셨고 사람을 못 알아보지도 않았다. 어머니의 장수를 두고, 건강은 대개 모계를 따른다며 내가 어머니를 닮아 장수할 것이라는 덕담을 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게 어떤 의학적인 근거에 따른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내 맘대로 되는 일은 아니다), 어머니를 닮아 죽는 날까지 건강했으면 좋겠다는 (당연한) 생각은 해본다.

A의 경우가 자극이 되었을 텐데 치매 예방을 위한 스스로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유튜브나 블로그에는 치매에 대한 자가 진단법도 있고 또 다양한 치매 예방법도 많은 것 같다. 사교 활동과 취미 생활, 적당한 운동 등이 치매 예방법으로 거론되지만 나는 독서가 제일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꽤 오랫동안 책과는 멀리 떨어져서 지낸 것 같다. 2주일에 한 번꼴로 동네도서관에서 책 빌려 읽던 것도 그만둔 지가 1년이 다 되어 간다. 책을 읽던 시간은 핸드폰으로 유튜브 방송들을 서핑하는 것으로 채워졌다. 이렇게 변한 원인은 물론 내 게으름 때문이지만 나이 듦에서 오는 정신적 · 신체적 쇠약증 또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신체적으로 눈이 침침해서 (돋보기를 껴도) 글자가 또렷하지 않고(억지로 읽으려면 급기야 머리가 지끈거린다), 서너 줄 읽고 나면 벌써 그전 대목은 까맣게 잊어버렸고, 읽은 대목을 몇 번을 되풀이 읽어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몽롱할 뿐이니 자연히 흥미가 없어져 30분을 지속할 수가 없었다. 차츰 책은 내 일상에서 멀어져 갔고 이제 집에 있는 날은 밤이고 낮이고 핸드폰의 포로가 된 느낌이다. ‘젊은 애들’도 아니고 내가 이거 뭐 하는 짓인가 하는 자책을 하면서도 무료한 시간을 메우는 일은 오로지 ‘이 물건’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정치 방송 섭렵, 주식 채널 서핑, 외국인의 한국 방문 체험기 감상 순례(요즘 이런 방송이 왜 그리 많은지!), 이런 것에 식상하면 온갖 장르의 음악 감상(트로트, 올드 팝송, 클래식, 일본 가요 등등)으로 탈출하기도 하는데, 때로는 듣다가 그대로 잠이 들어 프로그램이 ‘저 혼자 놀다가’ 끝이 난 상태로 휴대전화가 켜져 있는 걸 한밤중에 발견하곤 한다(배터리는 거의 다 소모된 채).


그 덥던 날씨도 제법 선선해졌으니 이제 핸드폰은 저만큼 밀어 두고 책을 읽어야겠다고 서가를 뒤져 책 한 권을 꺼내왔다. 이동주의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이다. 이 책을 꺼내 온 것은 작고한 소설가 이청준 선생이 생각나서였다. 선생은 어느 글에선가 자신이 매년 되풀이해서 읽는 책으로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와 이동주 선생의 이 책을 말한 적이 있다. 『싯다르타』는 나도 두어 번 읽은 적이 있지만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은 사놓은 지는 10년도 넘는 것 같은데 아직 읽지는 못한 책이다. 말이 나온 김에 이 가을에는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에 이어 이청준 선생의 소설들도 다시 읽어 보아야겠다. 나는 이분의 책은 거의 전부 가지고 있고 또 다 읽었다. 장편소설 『당신들의 천국』은 세 번을 읽었다. 이청준 선생의 작품에는 「눈길」이나 「선학동 나그네」 「매잡이」 같은 많은 명작 단편들이 있지만 유별나게 내 기억에 남는 작품은 「해변 아리랑」이라는 단편소설이다. 특히 그 서두 부분이 잊히지 않는다. ‘뻔뻔함’을 무릅쓰고 그 긴 대목을 적는다.


‘아이는 바닷가 외딴 산기슭 밭가에서 태어났다,라고 하는 것은 세월이 지나 아이가 자란 다음까지 가장 오랜 기억이 그 바닷가 산기슭의 밭머리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눈부신 여름 햇빛, 그 한낮의 별밭 아래 길고 긴 밭이랑이 푸른 지열기에 흔들리며 산허리를 빗겨 넘어갔다. 드문드문 수수가 점 섞인 더운 콩밭을 아이의 어머니 금산댁은 그 아지랑이 속을 떠도는 작은 쪽배처럼 하루 종일 오며 가며 김을 매었다. 우우 우우 노랫가락도 같고 바람소리도 같은 이상한 소리를 몸에 싣고 오가며 돌을 추리고 김을 매었다. 아이는 날마다 그 금산댁을 기다리며 밭 귀퉁이 무덤가에서 해를 보내곤 하였다.

밭머리 한쪽에는 언제부턴가 잔디 푸른 무덤 하나가 누워 있었다. 푸나무꾼들이 산을 오르내리며 지게를 쉬고 가는 길목 무덤터였다. 아이는 그 무덤 가 잔디에서 울음을 참으며 어머니를 기다렸다. 이마를 불태우는 햇덩이를 동무삼아 하염없는 원망 속에 어머니를 기다렸다. 목이 타면 근처 도랑물로 목을 축이고, 배가 고프면 언덕에 피어 익은 산딸기 열매를 따먹으며 하루 종일 이제나저제나 어머니를 기다렸다. 이따금씩 하얗게 콩잎을 이랑치며 굴러가는 바람기, 올된 수수모개를 타고 앉아 간들간들 위태로운 곡예를 피우다가 푸르르 홀연 환청 같은 날갯짓 소리를 남기고 사라져가는 멧새, 오래오래 하늘을 아껴 흘러가는 구름 덩이, 그리고 산 아래론 물비늘 반짝반짝 눈부신 바다 위에 어이 어이 어여루 먼 뱃노래 소리 유장한 돛배들의 들고남·····. 그 한가롭고 절절한 적막감 속에 아이는 무료스레 어머니를 기다리곤 하였다.

금산댁은 그러나 아이의 기다림에는 아랑곳없이 무한정 밭이랑만 오갔다. 우우 우우 그 노랫가락도 같고 울음 소리도 같은 암울스런 음조를 바람기에 흩날리며 조각배처럼 느릿느릿 밭이랑을 오고 갔다. 소리가 가까워지면 어머니가 어느새 눈앞에 와 있었고, 그 소리가 어느 순간 종적을 멎고 보면 그새 그녀는 저만큼 이랑 끝에 아지랑이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버리기라도 할 듯 한 점 정적으로 멀어져 있었다. 뒷산 봉우리의 게으른 구름 덩이가 모양새를 몇 번이나 갈아앉고 있어도, 눈 아래 바다의 한가로운 돛단배들이 셀 수 없이 섬들을 감돌아나가고 있어도, 그리고 아이의 도랑물길 다리가 더위와 허기에 지쳐 덜덜 떨려 오도록 금산댁은 내처 언제까지나 밭이랑만 무한정 떠돌고 있었다. 그러면서 무슨 필생의 업보처럼 여름밭 김매기로 긴긴 해를 보냈다. 점심때도 없었고 휴식도 없었다. 점심때가 기울면 금산댁은 어쩌다 콩밭 무 뿌리로 제 허기를 달랬고, 아이에겐 일된 수수모개를 잘라다 꽁대기의 풋여물을 훑어씹게 하였다. 이따금은 밭가로 걸어나온 금산댁이 땀에 밴 무명천 치맛말 속에서 아이에게 노란 밭딸 한두 개를 꺼내주기도 하였다. 금산댁이 아이에게 해주는 노릇이란 종일 가야 그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진종일 아이를 기다리게 했다가 해가 기울고 산그늘이 어둑어둑 밭이랑을 덮어 내려와야 금산댁은 비로소 소리를 그치고 머릿수건을 벗어 털며 아이에게로 돌아왔다·····.

아이의 기억 속에 뒷날까지 살아남은 생애 최초의 세상 모습이자 그 여름의 나날의 경험이었다. 아이는 이를테면 그 여름 밭가의 무덤 터에서 생명이 태어난 셈이었고, 그 하늘의 햇덩이와 구름장, 앞바다의 물비늘과 돛배들을 요람으로 삶의 날개가 돋아오른 셈이었다.’


이청준이 읽던 책, 그리고 이청준의 책을 읽는 것으로 이 가을 한 철을 보내야겠다. 치매 예방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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