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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Jun 04. 2022

다시 쓰는 일기 14 – 2022. 6. X

꿈의 해석

오늘 아침에도 꿈을 꾸었다. 최근 들어 잦을 때는 2, 3일 연속으로 꾼다. 나는 꿈을 자주 꾸는 편은 아니었다. 아니 거의 꾸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옳겠다. 그러던 것이 최근 언제부터인가 거의 주기적으로 꿈을 꾼다. 그것도 꼭 아침에만 꾼다. 새벽 5시쯤 잠이 깨었다가 다시 선잠이 드는데 다시 깨기 직전에 꿈을 꾼다. 잠에서 깨어난 직후에는 비교적 선명하던 것이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이내 기억이 희미해지고 이윽고 한 두 장면의 이미지만 남을 뿐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만다. 대부분 좋지 않은 꿈이다. 무언가를 잃어버려서 열심히 찾아다니다가 깨는 꿈이 많다. 길을 잃거나 출입구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꿈도 있다. 애타게 찾아 헤매지만 실패로 끝나는 꿈들이다. 꿈의 배경은 대부분 예전에 재직하던 직장이고 등장인물은 같이 일하던 직원들이다. 꿈을 꾸고 나면 늘 마음이 심란하다. 물건을 잃고 길을 잃는 꿈이 좋은 꿈이라고는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뭔가 근심거리가 있을 때, 또는 어디 기대를 걸고 있는  일을 앞두고 있을 때 이런 꿈을 꾸면 왠지 그 꿈이 의미 있어 보이고 뭔가를 암시하는 것 같은 기분도 든다. 그런 꿈을 꾸고 나면 당연히 기분이 좋지 않다.



 오늘 아침에 꾼 꿈도 그렇다. 아침 7시 반에서 8시 사이였다. 5시쯤 깼다가 이런저런 어수선한 생각 끝에 깜빡 잠이 든 것인데 딱 그 사이에 꾼 것이다. 깨어 보니 8시 5분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잊히기 십상이기에 이번에는 기억나는 대로 서둘러 메모지에 꿈 내용을 기록했다. 그래도 100% 정확하게 복기되지는 않았다. 배경은 공항이었다. 꼭 내가 근무하던 공항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비행기가 있고 긴 복도가 있고 사무실이 있고 눈에 익은 직원들도 보였다. 오늘은 화장실을 찾는 꿈이었다. 아무리 헤매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도중에 한 여직원을 만났다. 여직원은 예전에 일본에서 근무할 때 현지 직원이었던 어느 여직원을 닮았다. 얼굴에 표정이 없고 서릿발 같이 냉정한 인상을 주는 직원이었다. 나는 그 여직원에게 화장실 위치를 물었는데 그 여직원이 나를 화장실로 안내해 주기로 한 것인지 어쨌든 나는 이리저리 그 직원을 따라가고 있다. 아무리 가도 화장실은 보이지 않고 우리 회사 사무실이 보이기에(귀빈 승객을 안내하는 의전 직원 사무실인 것 같았다) 내가 그쪽으로 가려고 하니까 여직원은 화가 난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왜 화를 내는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사무실 입구에서 눈에 익은 남직원(머리숱이 아주 적은, 나이가 좀 든 직원)이 보여서 화장실 위치를 물었고 그 직원은 나를 안내해 주었다. 나는 그 직원에게 화장실 찾기가 참 어렵다고 말하며 그 직원의 안내에 따랐는데 그가 안내한 곳은 사무실 안이었다. 좁은 사무실이었고 안에는 승무원들이 서 있었다. 여전히 화장실은 묘연했다. 사무실 안에 화장실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거기서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는 것 같았는데 사람들이 많이 붐볐다. 그러다가 잠이 깼다. 결국 화장실은 찾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좋은 꿈은 아닌 게 틀림없다. 잠이 깨고 나서 우울한 기분으로 천장만 바라보았다. 오늘은 아내와 함께 가까운 절에 다녀오기로 한 날이다. 절에 가기로 한 날에 이런 찜찜한(?) 꿈을 꾸다니, 왠지 낭패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아내에게 꿈꾼 이야기는 하지 않았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 절에 다녀왔다.     



  글의 소제목을 ‘꿈의 해석이라고 붙였는데 알다시피 이는 프로이트가   제목이다. 프로이트는 꿈은 ‘무의식의 표현으로 그것에 담겨 있는 ‘상징적 의미 발견하기 위해서는 세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꾸는 꿈이 프로이트가 말하는 그런 ‘해석 통해 ‘원래의 의도 파악해야 하는 그런 종류의 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꾸는 꿈은 ‘해석 대상이 아니라 그저 ‘해몽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자신의 최근의 특정한 관심사에 대한 골똘한 생각이 지나친 나머지 나타난 단순한 원망願望이나 예시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면  그대로 ‘개꿈같은 것일 것이다. 그럼에도 때로 그런 꿈에 대한 ‘과도한 의미 ‘예감따위를 부여하는 터무니없는  자신의 일종의 소심함을 생각하면 문득 어이없어지며  연유 같은 것을 생각해 보게 된다. 꿈뿐만 아니다. 가령 자동차를 운전해 고속도로를 가다가 로드 킬을 당한 동물의 사체를 목격하거나 특정한 차림의 사람이나 물체와 맞닥뜨릴 , 예정된 시각의 차를 놓치거나 길을 잘못 들었을 , 뜻하지 않은 부상(가령  음료를 따다가 실수로 손가락을 베여 피가  ) 당할  등등에 그런 낭패의 심정이 되는 때가 있다. 물론 평소에는 똑같은 상황에 직면해도 아무 의식이 없다가도 어떤 특정한 행사나 기대를 목전에 두었을  발생하는 낭패감이다. 이런  버릇(?) 아마 어머니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된다. 청상에 홀로  어머니는 어떤 초자연적인 것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도 그럴 것이 중대한 결정 같은 것을 앞두고 어머니가 믿고 기댈 대상이란 그런 초자연적인 존재밖에 없었을 것이다. 마땅히 의논할 대상도 없고 오로지 자신의 판단으로 결정해야  어머니로서는 당연히 그런 초자연적인 힘에 의지하기 시작했고 어느덧 그런 습관은 종교처럼 굳어 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불교라는 종교에 의지하긴 했지만  마음의 의지였을  구체적인 판단의 근거를 제공해주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그런 어머니를 보고 자랐다. 자라면서 나는 그런 어머니의 ‘미신 못마땅해하며 언쟁도 하고 거부도 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보면 험한 가시밭길을 헤쳐 나오면서 굳어진 어머니의 생존 방식(?) 나무랄 수만은 없다는 생각 또한 솔직한  마음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에 관해서다. 한편으로는 그런 ‘비문명적인행태를 역겨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느덧 그런 비이성적인 믿음에 얽매이는 모순된  자신을 발견하고 우울할 때가 많다. 세상 일이 순풍에   듯이  나가기만 하는  아니니 그럴 때마다 사람은 어디엔가 구원의 손길을 내뻗기 마련이고 지푸라기라도 붙잡으려는 심정이 된다. 이제 그런 절박한 상황에 맞닥뜨릴  여하히 자신이 주체가 되어 합리적인 판단을 통해 올바른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 곰곰 생각해 보아야  때인  같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심령 휘둘려서 자신의 기를 탕진해서는  되지 않겠는가. 독서를 통해서든, 사유를 통해서든. 가족 간의 대화를 통해서든. 이상한(?) 꿈들을 계속해서 꾸면서 스스로 다잡는 각오이다.                  


(표지 사진은 아내가 그린 민화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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