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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Jun 09. 2022

빈자리

노년 단상斷想4

죽음이란 무엇인가?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제 오랜만에 만난 직장 선배의 이야기가 계속 귓가에 남았었는데 오늘 원로 희극인 송해 선생의 별세 소식을 들으면서 더욱 그랬다. 주변에서 일상 접하는 죽음이지만 평소 죽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어려서 육친의 죽음을 겪었고 자라면서 가까운 분들의 죽음을 적지 않게 보아왔지만 그저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당연한 하나의 과정으로, 또 나와는 거리가 먼 남 얘기로  받아들여 온 것 같다. 어쩌면 내 감성이 무딘 탓인지도 모르겠고 그동안은 죽음이라는 걸 심각하게 의식할 만한 나이가 아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던 것이 최근 어느 때부턴가 죽는다는 건 무엇일까, 하는 극히 원론적인 생각을 가끔, 제법 심각하게(?) 해본다. 그건 이제 내가 그럴 만한 나이에 이르렀다는 의미도 된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서 백세百歲를 코앞에 둔 오늘이고, 나와 동년배의 친구나 친지들 가운데 세상을 떠난 친구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긴 하지만 그래도 내 나이쯤이면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좀 더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정도의 위로는 받을지언정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고 애통해할 나이는 아닌 것이다. 90대 노인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반면에 70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많다.      



두 가지 측면에서 죽음을 생각한다. 하나는 내가 죽은 뒤의 모습이다.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내세라는 건 정말 있는 것인가? 단테의 『신곡』에서처럼 천당과 지옥이 있고 연옥 같은 것도 있는 것일까? 내가 죽으면 먼저 간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그 사람의 모습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때의 모습일까, 아니면 죽고 난 뒤의 세월만큼 늙어있을까? 매장이 일반적인 시대에는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로 가고 백은 땅으로 간다고 했는데 화장이 일반화된 오늘날은 어떤가? 저 세상에 간 내가 (만약 저 세상이라는 게 있다면) 그곳에서 아직 이승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 볼 수 있는가? 그들이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자신을 비난하고 험담하는지 아니면 그리워하고 슬퍼하는지 훤하게 바라볼 수 있는가? 언젠가 EBS 방송에서 김용옥 선생의 불교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데, 애당초 부처님은 생명 있는 것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정말 그런가. 죽음에 대한 또 하나의 생각은 살아 있는 자가 겪는 고통에 대해서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훨씬 더 가깝게 다가오는 죽음의 모습이다. 어제까지 아니 조금 전까지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손을 잡았던 그 사람이 죽었다. 거짓말처럼 이제 그 사람은 다시 볼 수가 없다. 나는 그대로인데, 아니 세상은 그대로인데 그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 부재의 슬픔이 죽음의 무게를 더한다. 육친을 비롯하여 나와 가까웠던 사람의 경우에는 그 상실과 부재의 슬픔이 더 크다. 언젠가 나는 일본 가수 가토 도키코에 대한 짧은 글을 쓰면서 그녀의 노래 ‘레몬’의 가사를 적은 적이 있다. 이 노래는 가토가 그녀의 남편을 떠나보내고 그 부재의 슬픔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데 길지만 가사 전체를 우리말로 옮겨 본다. 그 부재의 표현이 깊이 공감되어서이다.  


마당에 심은 레몬 나무가 조금 자라서

봄바람에 이끌려 하얀 꽃을 피웠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몇 번의 봄을 헤아렸나

추억만이 언제까지나 숲 사이로 비치는 햇살에 흔들리네

잊을 수 없는 그 여름날, 들이서 걷던 지도에도 없던 숲 속 오솔길

하늘에 울리는 새들의 지저귐, 재잘거리는 작은 생명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여름날의 수런거림

변한 건 아무것도 없네, 오로지 그것만이 꿈같을 뿐

불빛 거리를 방황하며 쓸쓸함에 헤맨다

억수 같이 내리는 빗속에서 눈물이 멈추질 않네

당신 없는 밤도 아침도 나 혼자만의 이 방에서

아무 일 없었던 듯 살고 있는 나 혼자만이라는 신기함

당신 없는 오늘도 내일도 창을 열어 햇빛을 받아들이고

말 없는 바람처럼 끝없이 꿈을 찾고 있네

끝없이 꿈을 찾고 있네

초가을 레몬 나무에 작은 열매가 흔들리고 있네     



어제 아주 오랜만에 만난 직장 선배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선배의 죽마고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선배는 친구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한동안을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만나서 식사를 한 후 사우나에 가서 휴식을 취하곤 했다. 친구가 건강이 좋지 않아 그 이상의 활동을 할 만한 기력이 없어서였다. 이전에 만났을 때도 가끔 그 친구 이야길 들은 적이 있어 영 생소한 것은 아니었는데 그 사이 그 친구가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선배는 내게 카톡 메시지를 보여주었다. 친구에게 보낸 것이었다. 친구의 화장 장례를 치른 다음날 보낸 메시지였다. 그러니까 친구가 더 이상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날 보낸 메시지인 것이다. 메시지는 긴 시간을 함께 보낸 친구를 보낸 아쉬움과 슬픔을 담고 있었다. 그 절절한 마음이 내게도 전해졌다. 메시지의 끝 대목이 이랬다. ‘기인 시간을 함께 해서 행복했고 그 여운이 너무 생생하네. 이제 그 헤아릴 수 없는 기억을 뒤로하고 자네를 보내줘야겠네. 이 글이 자네에게 보내는 마지막 글이지만 자네는 내 가슴속에 계속 남아 늘 꺼내보며 추억하겠네. 친구, 이제 아프지 않고 편히 쉬시게.’  친구는 하늘(?)에서 이 메시지를 읽었을까? 아니 휴대전화를 지상에 두고 갔으니 읽을 수는 없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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