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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Nov 13. 2022

다시 쓰는 일기 19 – 2022. 11. XX

입동도 지나고

며칠 전에 입동이 지났다. 바야흐로 겨울로 접어드는 셈이다. 알다시피 입동의 한자 표기는 立冬이다. 入冬이 아니다. 얼핏 생각하면 ‘겨울로 들어가는’ 절기이니 入冬이 맞을 것 같은데 설 립立자를 쓴다. 몇 해 전 입춘대길을 써 붙일 때 나도 모르게 入春大吉이라 쓰고는 다시 고쳐 쓴 적이 있다. 그런데 왜 ‘설  입立’자를 쓸까? 어느 블로그에서 입춘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입춘이란 말은 중국 황제가 동쪽으로 나가 봄을 맞이하고 그 기운을 일으켜 제사 지낸다’는 뜻이며 ‘입’에는 곧, 즉시라는 뜻도 있어 이제 곧 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적은 것을 보았다. 이런 어원에 대한 ’의미 캐기‘는 일본인들의 장기인 것 같다. 일본의 어느 민속학자의 얘기로는 설立 자가 들어가는 일본어 동사 ’立つ'는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것 – 일반적으로 신비적인 것이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다는 말이라고 한다. 우리도 그런 표현을 하는 ‘무지개가 섰다’라는 말을 한 예로 들고 있다. 용龍의 일본어의 훈독訓讀이 ‘たつ'인 것도 ‘평소에 우리에게 보이지 않던, 숨겨져 있던 것이 드러나는 의미’, ‘성스러운 것이 나타나는 의미’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한자어 하나 놓고 이런 현학적(?)인 말을 늘어놓는 것은 요 며칠 한자어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어서였다. 얼마 전 지방에 갈 일이 있어 KTX 역 대합실(이 말도 일본식 한자다)에서 기다리다가 둥근기둥 아래에 ‘접지단자함’이라고 써놓은 설치물을 보았다. 접지단자함의 단자라는 말은 흔히 쓰는 말이라 이해가 되었는데 접지는 接地, 즉 땅에 접한(연결된) 단자를 의미하나?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길을 지나다 보면 도무지 뜻을 알 수 없는 한자어(한글로 쓴)가 들어 있는 현수막들을 많이 보게 되는데 무슨 뜻일까 궁금한 적이 많았다(그때그때 적어놓지 않아서 기억은 나지 않는다). 현수막뿐 아니라 상점 간판에 적힌 단어들도 그랬다. ‘누진다초점’ 안경. 다초점은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누진’이란 말은 무슨 뜻인지. ‘누진세’의 누진은 아닐 테고. 사전을 찾아봐야 비로소 뜻을 알 수 있는 말들이다. ‘분진’‘분전함’‘하수사각형거’ 등등, 한글만으로는 의미를 추측할 수 없는 단어들이다. 명색이 중고등학교에서 한문 수업을 받은 세대임에도 이러하니 그렇지 않은 세대에게야 더 말할 것도 없겠다. 가족과 나들이를 나갔다가 가끔 이런 글자들이 눈에 띄어 물어보면 기상천외한 해석을 내놓기가 일쑤다. 이런 한자어들의 대부분이 일본식 한자들이다.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웬만한 용어들은 상당수가 일본에서 만든 번역어이거나 조어들이니 이제 와서 그 많은 말들을 우리말로 바꾼다는 건 아예 불가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두 세 글자로 표기 가능한 단어들을 우리말로 풀어서 쓰자면 오히려 더 불편하고 혼란스러울 테니 말이다. 일본식 표현에만 한정되겠는가. 영어를 비롯한 외래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요즘 많이 쓰는 ‘QR코드’란 단어도 미로 같은 모양을 떠올릴 뿐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 어느 신문에서 ‘정보 무늬’ 또는 ‘격자무늬부호’라는 말로 쓰기를 권유하는 것을 보았는데 쉽게 적응될 것 같지 않다. 잘 쓰든 그렇지 않든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잡문이라는 걸 쓰다 보니 말과 글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한자어는 되도록 쓰지 않고 우리말을 찾아 쓰려고 애쓰지만 이미 익숙해진 개념어들을 벗어나는 게 쉽지 않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은 포기하지 말아야겠다.     



2019년에 나온 김훈 작가의 산문집 『연필로 쓰기』의 첫 번째 글은 「호수공원의 산신령」이다. 작가는 20년째 일산 신도시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이 글은 작가가 호수공원을 산책하면서 본 것들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들을 적은 것이다. 공원 연못에 핀 연꽃과 백일홍 같은 꽃들, 잠자리, 매미 같은 곤충들, 물속의 자라와 두루미, 잉어 같은 생물들과 주인을 따라 나온 개들을 관찰하고 쓴 것들을 비롯하여 공원에서 장기 두는 노인들, 벤치에 앉아 수다를 피우고 있는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의 모습과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엿듣고(?) 쓴 글이다. 작가가 보고 관찰한 것들은 섬세하고 예리하기 그지없다.

‘연꽃은 절정에서도 솟구치지 않고 안쪽으로 스민다. 홍련이나, 연꽃의 색깔은 이 색에서 저 색으로 흘러가고 있다’라든지 ‘억새는 바람의 풀이다. 억새가 가진 것은 저 자신 하나와 바람뿐이다. 그래서 억새꽃은 꽃이 아니라 꽃의 혼백처럼 보인다’, ‘가을이 깊어지면 물속의 자라들은 바위에 올라가서 햇볕을 쪼인다. 자라들은 볕을 몸속에 저장해서 겨울을 날 작정인 모양이다. 몇 시간이고 같은 자리에 앉아서 미동도 하지 않는다‘. 또, ’일산 호수공원의 개들은 흘레를 붙지 않는다. 나는 이 사태를 매우 괴이하게 생각한다. 흘레를 마음대로 붙지 못하는지, 흘레할 생각이 아예 없는지, 개노릇 하기도 쓸쓸하고 힘들어 보인다.‘ 등등 인용하자고 들면 모든 페이지가 다 그 대상이 될 것 같다.



나 역시 일산에 정착하고 산 지 20년이 넘는다. 작가가 일산에 자리 잡은 시기와 비슷하다. 작가가 언급한 일산 호수공원을 나 또한 수백 번을 산책했다. 나도 호수공원의 연못을 보았고 매미소리를 들었으며 호수에서 놀고 있는 잉어를 보았다. 장기판을 둘러싸고 구경하는 노인들을 보았고 벤치에 멍하니 홀로 앉아 해바라기를 하는 노인들도 보았다. 옆자리에 앉아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엿들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본 것들은 얼마나 피상적인가? 그냥 연못 속에 핀 연꽃이고 억새고 개들이고 운동 나온 사람들이고 물이고 나무고 꽃이었을 뿐이다. 작가나 나나 똑같은 것을 보고 들었지만 작가는 그와 같은 아름다운 글을 썼고 나는 그런 글을 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건 타고난 작가의 글재주 이전에 사물에 대한 관찰력의 차이가 아닌가. 하지만 이제 새삼 그걸 깨닫고 의식적으로 사물을 관찰한다고 해서 보다 나은 글을 쓸 수 있을까? 관찰이란 게 그저 오랫동안 집중해서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 걸까? 우울할 뿐이다.      



『연필로 쓰기』 첫머리에 나와 있는 짧은 글이 좋아서 적어 보았다.     

연필은 내 밥벌이의 도구다.

글자는 나의 실핏줄이다.

연필을 쥐고 글을 쓸 때

나는 내 연필이 구석기 사내의 주먹도끼,

대장장이의 망치, 뱃사공의 노를

닮기를 바란다.     


지우개 가루가 책상 위에

눈처럼 쌓이면

내 하루는 다 지나갔다.

밤에는 글을 쓰지 말자.

밤에는 밤을 맞자.


<지난 주말 가족과 함께 양주 감악산으로 (생전 처음) 캠핑 갔다  이야기를 쓰고 싶었는데 막상 쓰려고 하니 반쪽도 채울 수가 없어서 엉뚱한 이야기로 바꾸었다. 그때 찍은 사진만 표지 장식으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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