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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Jun 30. 2023

사진집을 보며

장편소설을 비롯하여 여러 권의 책을 쓴 박도 선생이 편집한 사진집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을 읽었다(보았다). 선생은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사진 자료실에 보관된 수만 매의 사진 자료 중 한국 전쟁 관련 사진 1,200여 매를 골라 수록한 『지울 수 없는 이미지 1,2』를 펴낸 바 있는데,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은 그 가운데 1백 장면을 엄선하여 따로 엮은 것이다. 사진집에는 한국 전쟁에 대한 체험을 바탕으로 여러 권의 소설을 쓴 네 분의 작가의 글이 같이 실려 있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한국문단의 원로 작가인 김원일 · 문순태 · 이호철(작고) · 전상국 작가가 그들이다. 사진집은 폭격, 폭파, 전투 장면을 비롯하여 서울과 평양 거리 입성 장면, 처형 · 학살 장면과 시신들, 부상당한 민간인들과 피난민들의 모습 등을 7개의 챕터로 분류, 구성하고 있다. 한국 전쟁 직후에 태어나 전쟁을 직접 겪어보지 않은 나 같은 세대로서는 윗세대로부터 그 참상을 듣거나, 소설이나 영화 같은 픽션과 몇 장의 사진을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하긴 했지만, 이 책에 실린 충격적인 사진들은 생생한 비극의 현장을 실감케 했다. 모든 사진들이 다 그러했지만, 그중에서도 ‘부모를 잃고 목재 건물 앞 길바닥에 앉아 울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 ‘가족의 시신을 확인하고 오열하는 할머니’, ‘동생을 업은 채 전차 앞에 서 있는 한 소녀’(이 사진은 전에 어디선가 본 듯했다), ‘미 조사관에게 심문받는 북한군 소년 포로’, ‘두 다리를 잃은 중공군 병사가 판문점 송환 지역에서 고향으로 가는 첫걸음을 떼는 장면’ ‘미군 지프차 위에 앉아 미군 병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사내아이’, ‘해군복을 입고 미 해병대 장병들 앞에서 위문공연을 하는 어린아이들의 그 천진난만한 모습’, ’병중인 시각장애인 아내를 지게에 지고 피난 가는 남정네‘, ’등에 자기 몸보다 더 큰 보따리를 진 아버지를 업고 얼음이 떠내려가는 차가운 강물을 건너는 아들‘ 등의 사진은 몇 번이나 되풀이 펼쳐보는 가운데 나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어떤 사진은 가슴을 먹먹하게 했고, 또 어떤 사진은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구도가 특별할 것도 없어 보이는 사진 한 컷이 말해주는 그 강렬한 인상이 쉽게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사진을 보면서 예전 미국의 보도 사진 잡지 <LIFE>가 생각났다. 기억은 뚜렷하지 않지만 아마 이 사진집에 실린 사진들 중 어느 것은 그 잡지에서 본 것도 있을 것이다. 타블로이드(?)판으로 기억되는 <LIFE> 잡지는 많은 역사적인 사진을 남겼다. 수십 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 사진들 중 어떤 것들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사진의 이미지가 주는 특별함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집에도 몇 분가가 있었는데 다 어디로 갔는지 남아 있는 것은 없다.      



몇 년 전부터 이곳저곳 사진 전시회를 구경 다니고 있다. 대부분 흑백 사진 전시회들이다. 그중에서도 주로 1950∼60년대의 풍경을 찍은 사진들을 즐겨 찾아다닌다. 사울 레이터의 컬러 사진이나 마이클 케나의 흑백 사진,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민병헌의 사진 등도 인상적이었지만, 사진의 예술성에 대한 안목이 빈약한 나는 지난 시대의 우리 자연과 건축물, 그리고 도시와 마을과 사람들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는 ‘리얼리즘 사진들’이 좋았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자랄 때의 풍경과 풍물과 사람들이 그리웠던 것이고 그런 사진들을 통해 그 시절을 추억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풍경들은 1950∼60년대 남대문, 을지로, 명동, 퇴계로 등의 서울 거리를 찍은 한영수의 사진에 담겨 있었고, 임응식, 이명동, 구왕삼 등 한국 전쟁 전후의 사진들에서 만날 수 있었으며, 이강산의 여인숙 사진과 김지연의 광주 극장 사진에서 떠올릴 수 있었다. 요즘 중앙일보 토요판에 실리는 <사진의 기억>이라는 칼럼에도 그런 유형의 사진들을 볼 수 있다. 김녕만 사진가와 박미경 류가헌 관장이 번갈아 쓰는 칼럼인데, 예전 초가집 부뚜막, 폐허의 노동사 청사,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켜는 농부, 서울역 광장에서 대 여섯 덩어리의 보따리를 옆에 놓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젊은 여자의 사진 등이 그렇다. 나는 그런 사진들이 좋았다. 사진은 ‘모든 것을 동등한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고 미화시키는 특징’이 있으며, 특히 ‘비극적인 사건까지 아름답게 보이게 만들고 대상화하여 우리의 감성을 메마르게 했다’는 어느 철학자의 비판도 있지만 식견이 짧은 내게는 일면 그런 비판에 수긍이 가면서도 어느 한 시기를 추억하고 되새길 수 있는 사진이라는 게 있어서 오히려 우리의 감성을 풍요롭게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비록 스마트폰을 이용한 것이긴 하지만 나 역시 (남들처럼) 열심히 사진을 찍는다. 대체로 풍경이 아니면 전시회에서 구경한 작품들이다. 그중 일부는 블로그에 올린다. 그러나 블로그에 올릴 사진을 고를 때마다 실망한다. 사진에서 아무 특징도 느낄 수가 없다. 전시회에서 찍어 온 남의 작품은 잘 찍으나 못 찍으나 찍은 사람의 표정이 없다. 전시장에 걸린 작품이 있을 뿐이고 그 작품을 최대한 온전하게 드러낼 ‘촬영’(?) 기술이 필요할 뿐이다. 그러나 피사체가 자연이거나 사람이나 사물일 때는 사진을 찍은 사람의 표정이 감추어져 있다. 무턱대고 눈에 들어오는 현실의 어떤 풍경이나 장면과 사물을 그냥 담아냈다고 그게 ‘리얼리즘’ 사진은 아닐 것이다. 사진이 '무언가를' 말해주고 있어야 할 터이고, 보는 사람은 사진에서 그 '무언가를' 읽을 수가 있어야 할 터인데 나는 내가 찍은 사진 어느 한 장에서도 그런 걸 느낄 수가 없었다(간혹 아전인수격으로 그런 의미가 담긴 것처럼 오해하는 적은 있지만). 결국 결론은 사진을 찍는 나 자신의 문제로 돌아간다. 발터 벤야민의 글 「사진의 작은 역사」의 마지막 대목이 생각난다. ‘···그런데 우리들 도시의 어느 구석치고 범행현장이 아닌 곳이 있는가? 지나가는 행인들치고 범인 아닌 사람이 있을까? 오늘날 그의 사진에서 범행을 찾아내고 범죄자를 가려내야 할 사람은 고대 예언자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사진사가 아닐까?···’ 문제는 결국 사진을 찍는 사람이다. 주제넘게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이야기로 마무리를 한 것 같다. 다만  단 한 장이라도 의미 있는 사진을 찍어 보고 싶은 생각에서였다.


<표지 사진은 한영수의 작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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