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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Aug 29. 2023

순천기행

송광사

송광사에 갔다. 그동안 여러 절을 찾아다녔지만 이 ‘유명한’ 절은 이번이 처음이다. 송광사는 내게 두 가지를 떠올리게 한다. 소설가 강석경의 책 『저 절로 가는 사람』에서 읽은 송광사 아침 예불 광경이 그 하나다. 삼라만상이 잠든 새벽 시간의 장엄한 예불 의식이 작가에게 큰 감동을 준 듯하다. 그 뒤로 나도 언젠가는 송광사 아침 예불에 참여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또 하나는 어느 TV에서 본 장면이다. 눈이 자욱하게 내리는 날 불일암으로 가는 오솔길의 풍경이었다. 불일암은 법정 스님이 주석하던 암자이다. 그 아름다운 장면이 어제 본 듯 생생하다. 나도 언젠가는 저 길을 걸어 보아야지. 눈 오는 날. 그러나 나는 이날까지 그 두 가지 소원(?)을 이루지 못했고, 절호의 기회라고 할 이번 여행에서도 그랬다.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새벽 예불은 포기했고, 불일암은 역시 눈 오는 날 가야 할 곳으로 남겨두었다. 그 대신 스스로에게 한 가지 (기약 없는) 다짐을 했다. 송광사 템플 스테이를 해보기로. 그것도 겨울에(겨울에도 템플 스테이를 하나?).  

 조계산 송광사는 신라 말엽 혜림 선사가 작은 암자를 지어 길상사라고 부른 것이 그 시작이라고 한다. 이후 지눌이 이곳에서 수도하며 참선 도량으로 삼은 뒤 승보 사찰로 발전했다. 지눌, 혜심 등 16 국사가 이 절에서 배출됐다. 그래서 불보 사찰인 통도사와 법보 사찰인 해인사와 함께 삼보(불, 법, 승) 사찰로 일컬어진다. 마침 방문한 시각이 사시 기도가 진행 중인 때였는데 여느 절과 다른 예불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대개 서 너 분의 스님들의 독경으로 진행되는 사시 기도만 봐왔는데 송광사는 스무 분은 될 듯한 스님들이 법당 가득 들어차서 예불을 진행했다. 대 여섯 분으로 시작한 예불이 시간이 가면서 각각의 전각에서 예불을 마친 스님들이 하나 둘 대웅전에 모여서 종국에는 법당을 가득 채우고 우렁찬 독경 소리가 절 경내에 울려 퍼지며  분위기가 한층 장엄하고 경건해졌다. 기도가 끝나자 대웅전을 나온 스님들은 일렬종대로 줄을 지어 강원으로 돌아간다. 이 모습을 안행雁行이라고 하는 것 같다. 지난 5월에 류가헌에서 전시한 안홍범 사진전 ‘송광사 승경’에서 본 모습이다. 그러고 보니 종무소 벽에 그때 전시된 사진들 몇 점이 걸려 있다. 절 풍경이 아름다운 것은 물론이지만 그 아름다움을 영상에 담아낸 사진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본 적이 있는데 송광사에는 석등과 석탑과 풍경風磬이 없다고 한다. 석탑과 석등이 없는 것은 지반이 약한 때문이며 풍경 소리는 스님들 수행에 방해가 되어서라고 했던가.      


대웅전


위 4장의 사진은 안홍범 작가의 사진임


순천만 습지

순천 갯벌(순천만 습지)은 충남 서천 갯벌, 전북 고창 갯벌, 전남 신안 갯벌과 함께 한국의 4대 갯벌로 유네스코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되었다(2021.7). 순천만은 약 800만 평 갯벌인데 70만 평이 갈대밭이다. 사진이나 영상으로 익히 봐온 풍경이다. 순천만의 해질 무렵이나 새벽 일출을 본 어떤 분은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올 것 같은 풍경’이라고 했다. 순천만은 특히 가을에 와 보는 것이 좋다고 한다. 갈대와 철새와 노을이 장관이기 때문이다. 여름 오후 한 나절만의 짧은 여행으로 이런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외람된 일이지만 그 짧은 시간만으로도 많은 감동을 받을 수 있다. 안내 팸플릿에는 순천만 습지 산책을 3개의 코스로 나누고 있다. 1코스는 봉화산 옆 화포항에서 잔디 광장의 습지 기념관까지 7.8km인데 습지 서쪽에 해당한다. 2코스는 습지 기념관에서 용산전망대를 거쳐 와온항까지 5.9km의 동쪽 코스인데, 특히 와온항이 일몰 명소로 잘 알려진 곳이라 한다. 나머지는 자유 코스로 화포항에서 와온항까지 13,7km에 해당하는데 이 코스를 답사하면 순천만 습지를 ‘완벽하게’ 보았다고 할 수 있겠다. 적어도 용산전망대까지는 가 보아야 하는데(입구에서 2km 남짓 떨어진 용산전망대에서는 갯벌 전체를 조망할 수 있고 노을 구경도 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겨우 입구에서 1km쯤 나무 데크를 따라 걷다가 벤치에 앉아 노을 지는 것도 보고 갈대밭 속 갯벌을 기어 다니는 작은 게들과 짱둥어를 바라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제 머지않아 이곳 풍경은 ‘솜털 뭉치’처럼 변한 갈대와 새벽 물안개로 그야말로 ‘무진霧津기행’이 될 것이다. 그래, 어찌 이 환상의 풍경을 한 번의 여행으로 다 담아갈 것인가. 누구는 이곳을 서른 번 넘게 와 봤다고 하는데···.  


선암사   

송광사에서 선암사로 가는 골목재 오솔길은 6km이다. 이 길 또한 아름답다고 알려진 길이다. 재를 넘는 이 길은 자동차로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찻길로는 26km, 35분이 걸린다. 산길을 돌아서 가야 하기 때문이다. 걸어가 보고 싶은 생각이야 없지 않았지만 다시 걸어서 넘어올 것을 생각하면 아득하기만 하다. 별 수 없이 자동차를 타고 간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절을 향한다. 길 왼쪽의 계곡을 따라 물소리를 들으며 걷는다. 넓은 찻길이다. 아마 예전에는 이렇게 넓은 길이 아닌 호젓한 산길이었던 것 같다. 그 옛 정취를 잃어버린 것을 아쉬워하는 대목이 유홍준 교수의 책에 나온다. 건축가 서현 교수도 어느 책에선가 번듯하게 변한 영주 부석사 진입로에 대해서 안타까운 감정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선암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승선교 무지개다리다(보물 제400호). 승선교는 아래쪽의 작은 다리와 위쪽의 큰 다리 두 개로 구성되어 있다. 유 교수는 승선교를 ‘선암사 진입로의 하이라이트’라고 했다. 나도 여러 사진을 통해서 아취형의 이 다리를 보았다. 그런데 정작 이번 여행길에서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다리 근처에 나무들이 우거져서 시야를 가린 데다 보는 각도도 불편했다. 사진을 몇 장 찍었지만 다리 모습조차 식별할 수 없큼 평범한 풍경이 되고 말았다. ‘냇물이 잔잔히 흐를 때는 무지개다리가 물속의 그림자와 합쳐 둥근 원을 그린다’는데 이곳까지 와서 그런 모습도 보지 못하다니···. 집에 와서 유 교수의 책(『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을 보니 지금 진입로는 오른쪽 산자락에 붙은 새길이라는데 그래서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승선교를 지나면 강선루가 나오고 강선루를 지나면 삼인당이라는 못이 보인다. 삼인당이라는 이름은 제행무상, 제법무상, 열반적정 등 세 가지 새김(印)을 말한다고 한다. 선암사는 태고종 사찰이라는데 그래서인지 평소 다른 절에서는 보지 못했던 이름의 전각들이 많았다. 조계산 선암사는 태고종 총본산으로 백제 성왕 7년(529) 고구려 승려 아도 화상이 절을 짓고 해천사라고 부른 것이 그 시초라는 설과 신라 말 도선 국사의 창건설 등이 있다고 한다. 고려 시대 의천이 크게 중창하고 천태종의 본거지로 번창했으나 정유재란으로 거의 소실된 후 1660년에야 중창했다고 안내문에 적혀 있다. 선암사에는 사천왕상이 없고 대웅전의 협시보살상이 없으며 대웅전 어간문(깨달은 분만이 통과할 수 있는 중앙문)이 없는 등 세 가지가 없다고 한다. 봄이면 홍매화, 가을에는 단풍, 겨울에는 동백으로 사시사철 풍경이 아름다운 절이라고 한다. 유홍준 교수의 책에 보면 우리나라의 산사는 그 위치와 건물구조에 따라 강진 무위사처럼 소박한 절집, 부안 내소사처럼 화려한 절, 구례 화엄사처럼 궁궐 같이 장엄한 절, 그리고 영주 부석사 같은 장대한 파노라마의 전망을 가진 절 등 네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선암사는 ‘이도저도 아니고 크고 작은 당우들이 길 따라 옹기종기 모여 있어 마치 묵은 동네 같은 절’이라고 했다. 그래서 더 친숙하고 편안한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삼인당, 승선교
선암사 선암매(왼쪽)


지금 순천은 세계유산 축전이 열리고 있다. 축전지는 선암사와 순천갯벌이다. 8월 한 달간 운영되는 축전은 다양한 행사로 구성되어 있다. 선암사 진입로에는 축전을 알리는 안내 부스와 홍보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행사 안내원들이 방문객들에게 작은 쥘부채 하나씩을 선물로 나눠준다. 맑은 계곡물소리와 쥘부채가 일으키는 작은 바람이 더위를 식혀준다. 순천에서의 짧은 여행이 이렇게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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