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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Sep 10. 2023

다시 쓰는 일기 25 – 2023. 9. XX

오래된 가을

올해도 벌초는 대행사에 맡기고 차례는 각자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는 고향의 사촌 형님의 연락이 있었다. 코로나19가 시작된 2020년부터 바뀐 절차가 올해도 적용된다는 말씀이다. 여전히 하루 몇 만 명씩 발생한다고는 하지만 마스크 착용 의무도 해제되고 거리 제한이 풀린 지가 꽤 되었으니 올해는 예전처럼 종반들이 모여서 벌초도 하고 성묘도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으나 형님은 여전히 불안하신 모양이었다. 지난 5월 뒤늦게 코로나19에 걸려서 고생하신 터라 더욱 조심하시는 것 같았다. 올해까진 이렇게 하자는 말씀이 덧붙여지긴 했으나 아마 앞으로 예전 같은 행사 방식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까지 십수 년 동안 매년 추석을 일주일이나 열흘쯤 앞두고 서울에 사는 종반들이 고향에 모여서 벌초를 하고 추석 차례를 지냈다. 우리 집안이 돌봐야 할 조상 산소는 고조부 내외분, 증조부 내외분과 조부모를 비롯하여,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숙부를 제외한 백부와 막내 삼촌 등 아버지 형제를 포함하면 모두 11분이지만 합장묘가 있어 8위가 그 대상이다. 주손인 사촌 형님은 추석 보름쯤 전부터 윗대 조상들의 산소 벌초를 시작하여 서울 종반들의 직계 묘소 세 위만 남겨 놓는다. 세 위는 서울에서 내려간 종반들이 합동으로 벌초를 한다. 비교적 젊은 사촌들이 예초기로 풀을 베면 다른 사람들은 갈퀴로 긁어내는 작업을 한다. 사람이 여럿이다 보니 두어 시간도 지나지 않아 벌초는 끝난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촌들이라 저녁에는 대청마루에서 밤이 늦도록 밀린 얘기들을 나누고 술잔이 오간다. 풀벌레 우는 소리가 깊어가는 가을밤을 더욱 낭만적으로 만드는 시간이다. 다음날 새벽 마을 근처 온천에서 다 같이 목욕을 하고 와서 성묘를 시작한다. 제물을 담은 바구니를 들고 십여 명이 넘는 종반들이 앞산 뒷산을 오르내리며 차례를 지내는데 물론 고조부 내외분부터 순서에 따른다. 점심때쯤 되어야 마지막에 해당하는 막내 삼촌 성묘를 마친다. 큰집에서 준비한 나물 비빔밥(수년 동안 우리는 이 메뉴를 즐겨왔다)으로 점심 식사를 마친 뒤 뿔뿔이 귀경길에 오른다. 저마다 자기 조상에 진설했던 제물과 큰집에서 싸준 농산물들을 한 보따리씩 들고서. 해가 가면서 차츰 성묘에 참석하는 종반들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특히 안식구들이 그랬다. 아이들 입시가 코앞에 닥쳤거나 직장 일이 바빠서 등 저마다의 사정에 따른 것이었는데 코로나19가 발생하기 바로 전에는 안식구 참석자가 겨우 두셋에 불과하게 되었다. 큰집의 사정도 그랬다. 형수의 연세도 (도와주는 손들이 부족하면) 그 많은 식구들의 음식 장만과 설거지 등 큰일을 감당하기에는 무리였다. 그래서 어느 해 성묘 때 논의 끝에 큰집에서는 벌초하는 날 저녁과 다음 날 아침 준비만 간단히 하고 술안주는 시내에서 사가지고 가거나 배달을 시키기로 했고, 차례 지낸 후 점심은 시내 식당에서 먹고 귀경하기로 했다. 몇 년을 그렇게 지내오다가 코로나19가 터지면서 모임은 중단되었고 벌초도 팔순 가까운 형님이 감당할 일이 아니어서 대행사에 맡기기로 한 것이다.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이제 앞으로 이전과 같은 행사를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직계 조상 세 위는 전처럼 종반들이 모여서 벌초를 하고 같이 차례를 지냈으면 좋겠다. 최대한 간소화하여 안식구들의 골물을 줄이되, 종반들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고향과 선조를 되새겨보는 기회는 버리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벼이삭이 바람에 물결처럼 출렁이는 황금색 들판, 그 논둑길을 일렬로 줄지어서 성묘하러 가는 아름다운 풍경, ‘이 산소가 네게는 4대조가 되는 ㅇ자ㅇ자 어른이시다’, ‘여기는 네 증조모 산소인데 ㅇㅇ에서 시집오셨지’ ‘막내 삼촌, 올해도 여기 자손들이 다 모였습니다. 집안 모두 건강하고 복된 일만 생기도록 보살펴 주십시오’,  일 년에 하루쯤은 이런 날이 있어도 좋지 않겠는가.           



베란다 수납장을 뒤지다가 고등학교 때 교지를 발견했다. 50년도 더 전에 발간된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난 것 치고는 책 상태가 깨끗했다. 그런데 책갈피에 마른 단풍잎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마치 간장에 곰삭은 깻잎장아찌 같은 색깔이다. 조심스럽게 손을 대보니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다. 교지 발간일을 보니 11월 1일이다. 아마 가을 단풍잎이 고와서 잎 하나를 책 속에 넣어 두었던 것 같다. 그때 내게 이런 소녀 취향 같은 ‘멋’이 있었나 하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그 단풍잎에서 50년 넘는 시간의 흔적이 느껴져서 묘한 기분이 되었다. 책을 펼쳐보다가 깜짝 놀랐다. 내가 쓴 글이 있었기 때문이다. <축원(祝願)>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글 끝에 ‘교내백일장 특선’이라고 적혀 있다. ‘아, 그랬었지, 백일장에서 내가 쓴 글이 상을 받은 적이 있었지, 그래서 이 교지를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었구나’. 나는 오십 수년 전에 쓴 내 글을 읽어본다. 어렴풋이 당시의 기억이 떠올랐다. 비원(지금의 창덕궁 후원)에서 열린 교내백일장에서였다. 그래, 백일장에서 내준 제목이 <축원>이었지. 원고지 다섯 장 분량이었다. 지금 그 글을 다시 읽어 보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당시에도 나는 글쓰기에 ‘잔재주’를 부렸다는 생각에서였다. ‘여기 이 비원에서 원고지 5장을 채우는 것이 지금의 내 축원이다’라는 것이 글의 요지(!). 온갖 그럴듯한 유명 작가와 작품들을 열거하면서 정작 나는 그런 명문들보다 지금 여기서 ‘단 5쪽의 원고지를 잘 채워서 상이라도 하나 받아보는 것’이 내 축원이라는 것이다. 아마 심사하는 분은 이런 내 잔재주에 넘어가(?) 특선이라는 상을 준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첫대목을 조금 옮겨 보자.

 ‘나는 지금 5장의 원고지를 채우기 위하여 비원 주위를 헤매고 있다. 지나다니면서 썩은 나무뿌리를 발로 차보고, 몇 백 년씩 묵은 늙은 나무 위를 바쁘게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다람쥐를 필요 이상으로 오랫동안 지켜보고, 또 인정전 맞은편의 옛날 자동차들을 구경하고, 그래도 생각이 나지 않아서 연못가 주위를 뱅뱅 돌며 물속에다 돌멩이를 집어던지고, 짜증을 내고···. 축원! 나는 학교의 교실 안에서는 몽테뉴 같은 수필가를 부러워했고, 단테와 같은 사랑을 하기를 원했고, 톨스토이 같은 위대한 문호가 되기를 바랐지만 지금 이 비원의 숲 속 한가운데서는 누런, 겨우 다섯 장의 원고지를 채우는 것만이 나의 바람(願)의 전부이고, 나아가서 700여 명의 학생들의 박수를 받으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특선 상장, 아니 작은 입선 상장만이라도 하나 받는 것이다(이하 생략). 유명한 문인들을 거론했지만 실상 당시 나는 몽테뉴를 읽은 적도 단테를 읽은 적도 없었다. 그냥 번지르르하게 그런 이름들을 들먹이며 거짓 교양을 과시한 것일 뿐이다. 거기에다 나름 기발한 발상이라고 생각해서 원고지 채우는 걸 ‘축원’이라고 잔재주를 피운 것 아닌가. 부끄러웠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최초로 활자화된 내 글이라서 설레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나는 그 글을 두 번 세  번 읽어 보았다. 그리움 같은 것이 솟았다. 그래, 못났어도 그게 한 때의 내 모습이었으니 그 또한 소중한 것이야. 그 속엔 오랜 시간이 녹아 있으니 말이야. 커피색 같이 짙게 변색된 단풍잎처럼.     



이병주의 대하역사소설 『바람과 구름과 비』 5권째를 읽는다. 빈번하게 나오는 한시(번역이 없는 경우도 많다)와 작가 특유의 박식이 거슬리기도 하지만 ‘흥미진진’한 소설이다. 이 가을은 그의 소설 읽는 재미로 보내야겠다.

정호승 시인의 <가을꽃>을 베끼며 일기를 마친다.        


이제는 지는 꽃이 아름답구나

언제나 너는 오지 않고 가고

눈물도 없는 강가에 서면

이제는 지는 꽃도 눈부시구나   

  

진리에 굶주린 사내 하나

빈 소주병을 들고 서 있던 거리에도

종소리처럼 낙엽은 떨어지고

黃菊도 꽃을 떨고 뿌리를 내리나니     


그동안 나를 이긴 것은 사랑이었다고

눈물이 아니라 사랑이었다고

물 깊은 밤 차가운 땅에서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꽃이여         


<표지 사진은 아산 외암마을 풍경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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