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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Sep 22. 2023

‘여자의 일생’, ‘남자의 인생’

노년단상 13

노래방에 안 가본 지가 오래되었다. 재직 시에는 한 달에 한두 번은 가던 것이 지금은 일 년에 한두 번도 가지 않는다. 퇴직 후에도 한때는 입사 동기들끼리 모이면 술 한 잔을 하고 나서 누군가의 발동으로 아주 드물게 간 적이 있었지만 코로나19가 터진 뒤론 그 기억도 희미하다. 며칠 전 예전 해외에서 같이 근무했던 선후배 직원 몇 사람이 만나서 술 한 잔을 한 후 2차로 노래방엘 가게 되었다. 젊을(?) 때는 제법 노래 잘한다는 소리 듣던 나였는데 언제부턴가 고음은 올라가지도 않고 목소리가 갈라지며 탁성이 나오더니 요즘은 아예 소리가 목구멍에 걸려서 넘어오질 못하는 느낌이다. 그래도 옛날 자주 부르던 노래 한 곡을 억지로 부르긴 했는데 이건 노랜지 낭독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아! 무정한 세월이여!) 그날 동행한 선배 하나가 부른 노래는 나훈아의 <남자의 인생>이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나훈아 씨의 노래를 좋아하지만 6∼70년대 고향을 소재로 한 초기 노래를 주로 들을 뿐 다른 그의 유명한 노래들은 (그분의 작곡 능력은 인정하지만) 썩 좋아하지 않고 잘 듣지도 않는다. 그가 최근에 작곡한 노래들은 더욱 그랬다. 그날 선배가 부른 노래는 한두 번 들은 적이 있었고, 나훈아 씨의 열성 팬인 동갑내기 내 사촌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노래였는데, 남자의 ‘고달픈 인생’을 너무 감상적으로 묘사한 데다 가사도 다듬지 않고 그냥 풀어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특별히 기억에 남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날 선배가 부른 그 노래가 왜 그리 가슴에 와닿는지 집에 오자마자 유튜브에서 여러 번을 듣고 또 들었다. 나도 모르게 눈가가 축축해졌다. 별로 잘 난 것도 없는, 그렇고 그런 월급쟁이의 애환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지금 세대는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나와 같이 동시대를 산 중장년층이나 더 거슬러 올라서 나보다 일, 이십 년 윗세대에 이르기까지  ‘서민 가장’의 고단한 모습이 몇 분짜리 노래 속에 굵은 선 몇 개로 스케치한 듯 절절하게 재현되어 있지 않은가. 내 아버지는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 내게 그런 기억이 남아 있지 않지만 내 작은아버지나 그 아래 삼촌들이 남긴 ‘에피소드’들은 지금도 생각난다. 언젠가 숙모님이 들려주던 이야기다. 신문사에 다니던 작은아버지는 약주를 좋아하신 데다 야근이 많아 늘 귀가가 늦었는데 집에 오면 언제나 아이들 방에 먼저 들어가 잠든 아이들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시고 이불을 여며 주신 후에 안방으로 들어가신다고 했다. 어느 날인가 그날도 자정이 다 된 시각에 술이 엉망으로 취해서 들어오셨는데 아이들 방에 들어가시더니 ‘아버지 왔다’고 혀가 꼬부라진 소리를 내시면서 ‘너희들 주려고 과일 사 왔다’며 종이 봉지를 들어 보이는데 바닥은 찢어져서 뻥 뚫린 빈 봉지였다고 한다. 오는 도중에 내용물은 이미 빠져나간 빈 봉지를 행여 놓칠 새라 주둥이만 움켜쥐고 오셨던 것이다. 그 시대의 많은 아버지들처럼 작은아버지도 고지식할 만큼 직장 일에 충실하면서도 가정에서는 말이 없고 근엄하며 가부장적인 남성의 표본 같은 분이었다. 언젠가 쓴 적이 있지만 일본 작가 무코다 쿠니코가 에세이 「아버지의 사과 편지」에서 묘사한 그의 아버지 같은 바로 그런 모습이다. 그건 그렇고 고달픈 샐러리맨의 경험이 있을 리도 없는 나훈아 씨는 어찌 그리 절절한 가사를 쓸 수 있었는지! 광화문 사거리에서 봉천동까지 전철 두 번 갈아탄다거나, 홍대에서 쌍문동까지 버스 정류장 수를 적는 등의 감각은 대수롭지 않은 것 같아도 여간한 내공이 아닌 것 같다. 이름난 작사가 한 분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작사가는 나훈아 씨’라고 했다며 최근에 최백호 씨가 어느 신문과 인터뷰하면서 말하기도 했다.       



나훈아 씨가 노래한 것이 ‘남자의 애환’이라면 이미자 씨는 ‘여자의 숙명’을 노래했다고 하겠다. 그분의 초기 대표적인 노래 중의 하나가 <여자의 일생> 아닌가. 노래가 나온 1960년대 말만 해도 이런 풍조가 지배적이었으니 그 시대를 반영한 이런 노래도 나왔을 것이다. 『여자의 일생』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프랑스 작가도 제목으로 썼으니 여성의 곤곤한 삶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느 시대까지는 공통된다 하겠다.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가부장적인 남성 위주 사회에서 여자가 겪어야 했던  고통은 길게 이야기할 것도 아니겠다. 누구랄 것도 없이 내 어머니를 보면 그렇다. 청상에 홀로 되어 자식 둘을 키우느라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도 그런 고난은 ‘여자로서 당연히 견디며 겪어야 하는 운명’으로 생각하고 살아온 세대의 표본 같은 분이다. 자신의 행복보다 자식에 대한 희생과 의무감을 가장 우선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살아온 것이다. 그저 ‘여자이기 때문에’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분인들 갈등과 회한이 왜 없었겠는가. 세월이 오래 지나 어머니가 가끔 하신 말이 있다. ‘도둑질과 뭐 빼고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너희들 공부는 시켜야 한다’는 각오밖에 없었다고. 나중에 ‘저승에서 네 아버지를 만나더라도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했다. 어머니가 노래를 부르는 걸 본 기억은 없지만 오래전 언젠가 TV의 어느 프로에서 이미자 씨가 이 노래를 부르는데 이를 보던 어머니가 들릴락 말락 입술을 달싹이며 따라 부르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노래 속에서 자신의 인생을 투영하며 감회에 젖었을 것이다. 요즘 나훈아 씨의 노래가 장, 노년층의 공감을 얻듯이 내 어머니 같은 분은 이미자 씨의 그런 노래를 흥얼거리며 자신이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며 살았을 것이다.      



요즘 또래 친구들을 만나면 누구는 무슨 수술을 받았다느니 누구누구 선배 아내는 2년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느니 아내가 갑자기 한밤중에 하혈과 설사를 해서 응급실로 데려갔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오간다. 그러면서 나이 들어 그래도 의지하고 살아야 할 사람은 마누라밖에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며 ‘야, 너들도 마누라한테 잘해!’하는 말들을 한다. 그러자 또 누구는 그런다. 그래도 마누라가 나보단 오래 살아야 하니 남은 기간이라도 속 썩이지 말고 서로 의지하고 살아야지 하고. 뒤처지지 않고 버텨야 한다는 각오 하나로 뒤 돌아볼 여유 없이 앞으로만 죽자고 달려온 세월, 가정보다는 사회생활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달려온 세월이 이제 와서 돌아보면 꼭 그렇게만 살아야 했을까 하는 아쉬움을 너나없이 공통으로 느끼는 것 같다. 무심하고 잔정도 없고 벌어 놓은 것도 별로 없는 나 같은 사람은 뭐라고 보탤  말도 없어 그저 잠자코 들으며 입맛만 다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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