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간의 대전 생활을 마치고 천안으로 돌아오기 전 안타까운 소식들이 많이 들려왔다. 15년 전 교정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소년수 폭행사건 사건 당시 담당직원이었던 선배가 퇴직을 앞두고 암으로 돌아가셨고 10여 년 전 도주미수 사건으로 징계를 받은 선배는 마음고생이 심했던지 퇴직 후 1년 남짓밖에 안 됐는데 암으로 사망하였다. 후배들로부터 존경받는 선배 한분도 퇴직 후 5년도 안되었는데 암투병 중 돌아가시고 그 선배와 같은 공장 담당을 하던 동료직원 2명도 질병휴직 중이었다. 여러 가지 안 좋은 소식 중에 가장 마음이 아픈 소식은 동료 직원 B의 죽음이었고 그를 마지막 만났던 날은 지금도 아쉬움과 후회로 남아 있다.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던 날 근무 중인 직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직원들은 직원휴게실에 모여 TV를 통해 역사적인 장면을 보고 있었다. 오후 출장 근무인 나도 천안에서 함께 근무하던 S선배와 나란히 앉아 TV를 보고 있는데 휴게실 문이 열리더니 천안 동료직원 B가 "S형"하고 불렀다. 수용자 이송을 위해 대전에 와서 S선배를 불러내 밖에서 얘기를 나눴고 평소 그와 허물없이 농담을 주고받던 나는 B에게 "나는 눈에 안 보이냐?"라고 따지자 "같이 나왔잖아!"라고 대답하며 근무 중인 J선배를 불러달라고 부탁하여 J선배의 근무지에 구내전화를 통해 B가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달해 주었다.
S선배가 내게 "7월에 천안 복귀하면 B를 배치주임 시키고 잘 봐줘"라고 말하기에 "B는 남의 말도 안 듣고 고집이 세서 안 돼요"라고 대답했는데 평소대로라면 B가 화를 벌컥 내며 시켜줘도 안 한다느니 격한 반응을 보였을 텐데 이상하게 무표정으로 아무 말이 없었다. S선배가 B와 내게 직원식당에 식사하러 가자고 하기에 오후 출장인데 날씨가 쌀쌀해서 관사에 가서 잠바 좀 입고 올 테니 먼저 식당에 가 있으라고 말한 뒤 잠바를 챙겨 직원 식당에 가보니 S선배와 B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오후에 S선배가 B가 공무원 연금 남편이 죽으면 아내에게 몇% 가 지급되는지? 물어보는 등 극단적인 선택을 예비하는 질문을 해서 좋은 쪽으로 얘기를 해주었는데 불안하다는 말을 하였다. 자신이 데리고 있던 출소자가 천안의 핫한 지역 아파트 분양을 받아 준다며 B에게 돈을 요구하였고 B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재산과 처갓집 식구 등 여기저기서 빌려온 돈을 모두 출소자에게 주었는데 분양받았다던 아파트 2채는 사기였고 출소자는 자취를 감추어 연락이 되지 않았고 B는 금전적으로 최악의 상태에 몰려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나는 그 사실도 모르고 그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지 못하고 평소처럼 농담을 하였던 것이다. S선배가 "설마 죽기야 하겠어?"라고 말하였는데 이틀이 지나 야근 지원근무를 들어온 J선배가 "B소식 들었냐?"라고 물어보기에 못 들었다고 하니 낮에 죽었다고 연락 왔다며 그저께 인사를 하는데 평소와 다르게 90°로 허리를 숙이며 "J형! 그동안 고마웠어요"라고 말하기에 느낌이 안 좋아 나쁜 생각 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는데 이렇게 됐다는 얘기를 하는데 무언가로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B의 장례가 끝나고 S선배가 내게 와서 B 아내한테 전화 왔는데 B가 S선배한테 500만 원 빌린 것 등 직원들에게 빌린 돈을 일일이 적어 아내에게 퇴직수당 나오면 갚아 달라고 해서 전화드렸다고 해서 자기 돈은 안 갚아도 된다고 말했다며 죽는 놈이 그런 것까지 써놓고 갔다는 얘기를 했다.
그해 7월 말 나는 천안으로 복귀하였고 소내 곳곳에 남아있는 무심한 친구 B와 함께 했던 순간들이 떠오르며 그를 마지막 만났던 날이 아프게 다가왔다. 오늘도 그의 고향 소정리길을 아내와 걸으며 가슴속에 아프게 새겨지는 B를 회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