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아내 37

살면 살아진다

by 지와 사랑


작년 8월 아내에 대한 36번째 글을 쓴 후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아내가 나에 대한 기억을 잃었을 때와 망상 증상이 심할 때 힘들었던 시기를 생각하며 순간순간 찾아오는 고비를 잘 넘기고 있다.


아내를 돌보는 나를 가엾게 보는 사람들도 많지만 나는 아내가 한없이 가엾고 불쌍해 보일 때가 많다. 그래서 방이나 거실에서 옷을 입은 채로 용변을 봐도 웃으며 아내를 욕실로 데려가 씻기고 청소를 한다. “씻을 때가 됐는데 마침 잘됐네”, “청소할 때가 됐는데 마침 잘됐네”, “잘했어”라는 말들을 한다. 힘들고 꺼려지는 일들도 일상이 되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낼 수 있다. 지나온 순간 견뎌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살면 살아진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고비를 넘기며 이런저런 생각들을 떨쳐버리고 그저 주어진 하루에 감사하며 살다가도 어느 순간 “앞으로 어떤 길이 펼쳐질까? 내가 가는 길의 끝이 어디인가?”라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한다.

아내의 서재 속 책을 보던 중 천상병 시인의 시집이 눈에 띄어 읽고 있는데 젊은 날 관심도 두지 않았던 시인의 꾸밈없이 맑고 순수한 천진난만한 시들이 가슴에 와닿는다.


아내가 잠든 새벽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뒷산에 오르며 이런저런 염원들을 담아 기도문을 외우는데 오늘은 한하운 시인의 전라도 길(소록도 가는 길에)이 가슴속 깊이 새겨진다.



가도 가도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天安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西山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윗속으로

찔룸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꼬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꼬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아내가 가는 길이 가도 가도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인 길이 아니어야 하는데 남은 발가락이 잘리지 않길 바라는데 가도 가도 보이지 않는 먼 길이 아니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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