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의 조카 웜우드에게
네 환자와 어머니가 어떤 사이인지 듣게 되어서 몹시 기뻤단다.
인간의 집이란 곳은 우리가 영혼을 수확하기에 가장 좋은 사냥터지.
특히 가장 가까운 사이일수록
서로를 증오하게 만들 때 온몸이 전율할 정도로 즐겁지.
자, 이제 그들의 일상을 지옥으로 바꾸는 법을 가르쳐주마.
첫 번째 규칙은 환자의 시선을 철저기 ‘내면’으로만 돌리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 자신의 상태, 자신의 영적 성장에만 몰두하게 하렴.
환자는 자기자신과 대화하느라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어머니의 피곤에 찌든 얼굴과
류머티즘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핵심이란다.
환자가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게 된다면 방해하지 마라.
대신 ‘영적인’ 기도를 하게 유도하렴.
그녀의 고단함이나 류머티즘 같은 유치한 현실 말고,
‘영혼의 구원’이나 ‘죄에서의 구원’ 같은
아주 고결한 제목으로 기도하게 만드는 거야.
현실의 어머니는 잊고
그가 만들어낸 ‘가상의 어머니’를 위해 기도할 때
실제에서는 멀어지고 관계는 어긋나게 되지.
환자가 무릎을 꿇고 영혼을 위한 거창한 기도를 올리는 동안,
거실에서 힘겹게 설거지를 하는 어머니를 보렴.
환자는 어머니의 영혼을 위해 기도한다고 자부하지만,
정작 어머니에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말 한마디나 집안일을 돕는 행동이지.
이 간극이 바로 우리가 파고들 틈새란다.
이제 대화의 기술을 가르쳐 주마.
아주 사소한 표정과 말투에 집중하게 해.
어머니가 가볍게 내뱉은 한마디나 의미없이 한 말을 ‘공격’으로
크게 확대 해석하게 만드는 거야.
그녀가 눈썹을 살짝 찌푸리거나 목소리 톤을 조금만 높여도,
그것이 자신을 믿을 수 없다거나 한심하게 보고 있는 거라고 굳게 믿게 하렴.
정작 자신의 얼굴 근육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모르면서,
타인의 표정은 아주 예민하게 관찰한단다.
아니 표정뿐 아니라 단어나 어투 하나하나에도 그렇지.
이 효율적인 우리의 비밀 도구를 뭐라고 부르는지 아니?
바로 ‘이중잣대’란다.
자신에게도 상대를 거슬리게 하는 표정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상대가 언짢은 내색을 한다고 도리어 서운해 하지.
환자 자신은 말하지 않은 ‘의도’까지
상대방이 깊게 생각해 주길 기대하고 바라면서,
어머니는 오직 어머니가 내뱉은 ‘말’로만 판단하고 평가하게 하렴.
이것으로 자기는 피곤해서 짜증을 냈다고 변명하지만,
어머니가 피곤해서 낸 짜증은 용납할 수 없는 모욕으로 느끼게 만들 수 있단다.
보렴, 이 얼마나 유쾌한 광경이냐.
한 지붕 아래 살면서도 두 사람 사이에는 거대한 틈이 생겼단다.
하루종일 떨어져 있다가 겨우 만난 짧은 식사 시간조차도
서로를 향한 불신과 오해로 침묵이 흐르는 구나.
웜우드야, 나는 이 침묵소리에 흥분이 되는구나.
격렬하게 연주되기 전의 잔잔한 간주곡 같아서.
지옥에서 본격적으로 연주되는 비명소리가 몹시도 기대되는 구나.
환자가 주변을 보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 내면 안의 ‘영성’에 심취해 있을때가 기회인 법이다.
스스로를 ‘성자’인냥 믿게 하면서 동시에
그의 어머니만이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여기게 만들어라.
어머니를 맡은 우리의 동지 글루보즈와 긴밀한 협조를 하는 것도 잊어버리지 마렴
너를 사랑하는 삼촌, 스크루테이프로부터.

2화에 ‘교회’에 이어
악마는 우리의 일상을 뒤흔들 작전을 짜고 있습니다.
이번 장소는 바로 집(가정)에서 이지요.
그동안 악마의 ‘이중잣대’에 놀아났다는 생각에
억울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지만
이제라도 악마의 비법 편지를 여러분과 함께 몰래 읽을 수 있어서 기쁩니다.

게으른 탓일까요.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전 까지가 제일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아이가 먹을 때, 입는 때 등등
아이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육체적인 수고로움이 필요로 했고 손길이 가야 했습니다.
특히, 첫째 아이와는 달리
둘째 아이는 자기 주관과 표현이 확실한 아이였습니다.
말을 하지 못했던 8개월 무렵에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무언가를 계속 말하고자 했지요.
나는 ‘생계형 일하는 엄마’로
일을 하고 녹초가 되어 집에 들어가면
또 ‘아이가 고집 부리겠지, 보채겠지...’ 하는 생각에
집에 들어가는 것이 정말로 싫었습니다.
그 시절의 나는
‘사무실에서 일할래? 집에서 애 볼래?’ 라고 누가 물어보면
두 번 생각 하지 않고
‘일하는 게 백배 나아’를 선택했습니다.
나는
‘둘째 아이는 발로 키운다는데,
대체 우리 아이는 왜 이러지?‘ 라고 다른 아이와 비교를 했고
아이의 타고난 기질과 성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고분고분 말을 잘 들어 줬으면 하는
통제하고 조정하려는 마음‘에, 그 헛된 기대에 괴로워했습니다.
괴로워 죽을 것 같았던 그 때
선택했던 것은 ‘아이를 ‘관찰하기’ 였습니다
그냥 ‘아, 저 아이는 저럴 때 저런 표현을 쓰고,
저런 행동을 하는구나’하고
아이를 있는 그대로 봐주기로 했습니다.
‘아이가 틀렸어, 나빠, 잘못되었어’ 가 아니라,
‘내가 아이를 잘못 키우고 있는건가’ 하며 자책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아이의 타고난 기질과 성향을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아이가 엄마의 수고를 알아주는 나이가 되면
엄마인 나도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더 여유로워지면 나아지리라,
서로가 좀 더 성숙해지기리를 기다렸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과 육아에 지친 엄마가 아니라
자기를 더 안아줄 엄마가 그리워서,
포근한 사랑이 더 그리워서
떼를 썼던 것은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일부러 아이가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이 아님에도
아이의 말과 행동에서 짜증이 나기도 합니다
특히 피곤하거나 몸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더욱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신경이 곤두서거나 할 때
더욱더 나 자신과 아이에게 관대함을 선물하고
육체적으로도 쉬어줘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주변에도 도움을 요청할 수 있으면
요청해서라도요
떼를 쓰는 아이를 겨우 어르고 달래
어린이집에 데려다 놓고 츨근한 날, 화장실에서 울고 있으면
청소하시는 여사님들이 오셔서 위로해주셨지요
‘곧 괜찮아 질거에요, 지금은 금방 지나가버려요.
그때가 되면 지금이, 아이가 어릴 때가 그리워질걸요?' 라면서요
시간이 흘러,
드디어 나도
그때 나를 위로해줬던 여사님들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응원해 봅니다.
모든 일하는 엄마들 ‘파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