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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개나리 11

by 강순흠

노란 개나리 11화
두 어머니 아래에서, 바다보다 넓은 집
장대비가 내린 그다음 날, 의회는 마을 서당 옆 작은 마루에 법첩을 올려놓았다.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붓끝으로 꾹 눌러쓴 한 이름이 거기 남았다.
“강두석(姜斗錫)”
이제 두석은 근임의 아들로 입적되었다. 복례는 더 이상 ‘바깥’의 여인이 아니었다. 의회의 말처럼 “하늘 아래 그늘 없는 지붕”을 이룬 것이다.

근임은 조용히 복례의 짐을 받았다. 다 낡은 베잠방이 하나, 솜이 비틀린 이불이 둘. 그리고 가장 마지막, 아이의 누비저고리를 꺼내 접을 때, 근임은 손끝으로 그 감촉을 천천히 눌렀다.
“어미의 손끝은 다 닮았지. 누에 실을 뽑을 줄 알고, 눈물을 감출 줄 아는 법이니까.”
복례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마님… 저 같은 여인이 감히…”
근임은 복례의 손을 잡았다. “내게는 오직 하나의 바람이 있소. 이 집에선 누구도 외롭지 않길. 누구도, 소외되지 않길.”
그 말에 복례는 끝내 울음을 삼키지 못했다.

두석이 네 살 되던 해, 근임은 아이의 손을 잡고 고추 말린 마당을 함께 돌았다. "이 애는 해를 닮았구먼. 사람을 따스하게 비추는 해. 네가 낳았지만, 내 품에서 자랄 것이니 내 아이요.”
복례는 그 말에 다시 고개를 숙였고, 근임은 이어 말했다. “허나 아이는 하늘께서 세 여인의 품을 다 쓰라 보내신 거요. 박씨 부인의 소원, 내 기도의 응답, 그리고 네 눈물에서 피어난 아이.”

장마 끝 물기 어린 장독대 앞, 근임은 조용히 절구를 찧고 있었다. 붉은 고추가 눌려 맑은 기름을 뱉을 때마다, 그녀의 마음도 조금씩 풀렸다.
두석은 이제 근임의 품에서 잠들곤 했다. 복례는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다 문지방에 앉아 조용히 바느질을 했다. 고운 빛깔의 누비 저고리는 두석의 겨울옷이 될 것이었다.
“그 아이는 우리의 아들입니다.”
근임이 조용히 말했다.
복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알고 있습니다, 그 품이, 저보다 먼저였으니까요.”
그 말에 근임은 절구질을 멈췄다. 땀 젖은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고, 복례를 바라보았다. 말없이 다가가 복례의 옆에 앉았다.
“이 아이를 잘 키워보세. 가문의 맥은 끊어지면 안 되오.”
“그리하십시오. 제게 이름이 남지 않더라도… 그 아이가 존귀하게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습니다.”
“하지만 너는, 두석의 어미다. 그리고… 이젠 내 자매다.”
복례는 그 순간 눈물을 삼켰다. 두 여인의 사이엔 오랜 바람결처럼 고요하고도 단단한 것이 흐르기 시작했다.
두석은 근임의 아들로 입적되었고, 복례는 의회의 가까이에 공공연한 존재가 되었다. 처음엔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자 누구도 그것을 흠이라 하지 않았다.
복례는 두석을 품에 안고, 근임은 등을 쓸어내렸다. 한 아이에게 두 어머니가 있었고, 그들은 질투 대신 존중으로 살을 섞었다.
의회는 저녁마다 뒷마당 팽나무 아래에서 세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평온했고,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세월이 흘렀다.
복례는 둘째 아들을 낳았다. 의회는 그 아이를 안으며 “네 이름은 영석(永錫). 길이 이어질 귀한 그릇이로다”라 말했다.
이듬해, 첫째 딸 영인(永仁)이 태어났고, 뒤이어 둘째 딸 화덕(花德), 막내딸 영화(永花)가 태어났다.
근임은 복례의 아이들을 모두 품었다. 병든 날엔 죽을 끓여 먹이고, 장을 지어 입술에 찍어주며 “니 어미는 니 생각에 새벽부터 콩을 갈았다”며 아이들을 웃게 했다.
복례는 아이들에게 언제나 말하곤 했다.
“너희에겐 두 어머니가 계신단다. 한 분은 마음을 품으셨고, 한 분은 너희를 낳으셨지. 둘 다 너희를 하늘처럼 사랑하신단다.”
두석은 늘 그 말을 마음에 새겨졌다. 그래서 그는 아무리 춥고 배고픈 날에도 자신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 여겼다.


어느 봄날.
근임과 복례는 뜰 앞에서 씨앗을 고르고 있었다. 해가 넘어가는 저녁, 두석이 쪼르르 뛰어오더니 복례의 무릎에 안겼다.
“어머니, 나중에 크면 나는 두 엄니 다 모시고 살 거야.”
근임이 웃었다. 복례는 말없이 그 이마에 입을 맞췄다.
하늘엔 노란 개나리가 피기 시작했다. 두 어머니의 사랑 속에, 하나의 씨앗은 뿌리를 내려 자라고 있었다.

의회는 어느 날 복례에게 말했다. “근임은 하늘 같소. 넓고 조용하며, 깊은 물을 가둬두지 않소. 자네는 강 같소. 때로는 격정이 있으나, 흐르며 모든 것을 감쌉니다.”
복례는 그 말에 웃었다. “그럼 나으리는요?” “나는 다만… 그런 하늘과 강을 바라보는 산일 뿐이오. 그대들이 날 품어주는 덕에, 나는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소.”

밤이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마당. 서로를 질투하지 않는 두 여인의 그림자. 그 마당을 지나는 바람은 늘 포근했고, 그 바람이 지나간 자리엔…
노란 개나리가 피어났다.


작가의 말
한 지붕 세 식구.
그러나 이들은 결코 셋이 아니었습니다.
한 사람의 결핍을 두 사람이 채우고,
한 사람의 눈물을 두 사람이 닦아주었습니다.
진정한 가족이란, 피가 아니라 마음의 언약으로 맺어지는 것임을
근임과 복례는 증명해 보였습니다.
두석은 그런 사랑의 터전에서 자라,
존귀함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알게 된 아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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