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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개나리 12

이름 없는 말, 별이 되다

by 강순흠


여섯 살 난 두석은 새벽마다 아버지 의회가 염전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를 기다렸다. 햇살이 퍼지기 전, 의회의 그림자가 염전 둑 위에 드리워지면 두석은 소리 없이 달려가 등짐을 받아 들었다.
“아버지, 무거워요.”
“그건 바닷물보다 가벼운 소금이란다. 네 이름처럼.”
두석(斗錫). 하늘을 담는 그릇과, 세상에 은혜를 베푸는 사람.
그 이름은 아버지가 바닷가를 걷다 짓던 날의 바람처럼 부드러웠다.
두석은 글을 보자마자 영특하게 깨쳤다. 집안의 족보, 장부, 심지어 비녀 상자에 붙은 낡은 한자까지 외우며 지나갔다. 근임은 장독대 앞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말했다. “이 아이는, 말꽃이 피는 아이야. 자라면 바람이 흔들리겠지.”
복례는 한글 성경책을 읽던 두석을 보고 웃었다. “글자란 건 너처럼 착해야 한단다. 사람을 살리는 말이 돼야지.”

두석은 마당에서 놀다가 마을 어귀에 몰려든 사람들 틈으로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그곳에선 서당 훈장이 군청 소속 헌병들에게 땅에 내리 찍히고 있었다.
“조선말로 수업한 죄.”
군도의 칼끝에 훈장의 피가 튀고, 장정들이 침묵한 채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 의회가 달려와 두석의 어깨를 감싸며 눈을 가리려 했다.
그러나 두석은 그 틈으로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날 밤, 집에 돌아온 그는 아무 말 없이 종이 위에 커다란 글씨를 썼다.
“그분은 죄가 없어요.”
근임은 그 종이를 찢지 않고 항아리에 숨겨 두었다.


며칠 후, 두석이 늘 따르던 눈먼 백구가 순사에게 군화에 차여 죽었다.
“시끄럽게 짖었으니, 맞아도 싸지.”
사람들은 외면했다.
비가 내리는 날, 두석은 산자락으로 올라가 직접 개를 묻어 주었다.

그리고 무덤 앞에 마지막 밥을 주었다.
복례가 쌀알 하나 없는 솥을 보며 말했다.
“사람도 못 먹는 세상에, 개한테 밥을 주냐?”
두석은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
“개도 억울했어요. 말은 못 해도 알잖아요.”
복례는 말없이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손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그 순간, 그녀의 눈엔 ‘자식’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맺혔다.


봄날, 일본인 순회교사가 임시학교에 들어왔다.
칠판 위에 또박또박 써 내려갔다.
「일본어는 천황의 말, 조선말은 야만의 언어」
아이들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두석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그럼… 제 어머니는 야만인입니까? 제 이름도?”
순사는 몽둥이를 들었지만, 교실 뒤편에서 의회가 조용히 나섰다.
“이 아이는 말의 주인이 되려는 자요. 그것이 어른들의 몫이 아니던가.”


다음 해 봄, 의회는 결심한다.
“이 아이는 집안이 아니라 시대에 맡겨야 하겠다.”
그렇게 두석은 소안도로 향한다.
새 신발에 묵은 때가 묻고, 봇짐 안에는 어머니 복례가 싸준 조밥과 근임이 꿰어준 바늘땀 한 땀 한 땀이 담긴 속적삼이 들어 있다.

마을 사람들은 말한다.
“저 아이는 글을 깨우치기 전에 세상을 먼저 읽은 아이지.”
“두석아… 잊지 말거라. 네가 본 것들, 들은 것들… 그건 다, 너를 사람으로 만들 거란다.”

두석은 조심스럽게 복례가 싸준 조밥과 근임의 속적삼을 꺼내 품었다.
그 안엔 말보다 깊은 기도가 담겨 있었다.
배는 천천히 떠났고, 복례는 물가에 서서 등을 돌린 채 입술을 깨물었다.
“두석아… 잊지 말거라.
말 없는 사람들의 말이 되어라.
이름 없는 이들의 별이 되어라.”
바람이 등을 밀었고, 두석은 바다 위에서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나는 내 이름을 지킬 것이다.
우리말로 말하고, 우리 글로 쓰리라.”
그날, 노란 개나리꽃이 염전 끝자락에서 피기 시작했다.



#작가의 말
두석은 총명한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먼저 읽은 아이였습니다.
피 흘리는 훈장의 몸에서, 억울한 백구의 눈에서,
조선말을 조롱하는 글씨에서
그는 기억해야 할 것들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그 기억이 언젠가 그를 불쏘시개로 만들었고,
그 불은 언젠가 조선의 봄을 데우게 될 것입니다.
“말을 아는 자가 사람을 알고,
사람을 아는 자가 나라를 지킨다.”
세상을 보는 눈은 지식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기억하고 슬퍼할 줄 아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그게 그를, 하나의 씨앗으로 자라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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