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교실,별을 묻은 사람들
두석은 뱃전에 걸터앉아 금당도의 석양을 바라봤다.
바람이 옷깃을 쓸고 지나갈 때, 복례가 손에 쥐여준 조선어 독본과 근임이 꿰어준 흰 속적삼이 따뜻한 체온을 머금고 있었다.
“말은, 너를 사람이게 할 것이고
글은, 너를 민족의 한 줄기로 키울 거다.”
섬 너머, 소안도 민족학교.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러나 수많은 존재를 만들어낼
비밀의 교실이 거기 있었다.
민족학교는 보통학교가 아니었다.
마당 한켠 흙바닥에 교단이 있었고, 수업은 때때로 바닷가 모래밭,
어느 날은 소나무 그늘, 어느 날은 굴 안에서 이루어졌다.
“우리 학교엔 교장도, 교감도 없다. 대신 ‘혼’이 있다.”
이야기를 들려준 건 동급생 순형이었다.
책을 좋아하지만 지식보단 의미를 먼저 묻는 아이.
늘 “이건 왜?”라는 말부터 꺼내며, 때때로 감정을 숨긴다.
그에 반해 영재는
장정 같은 말투, 손에 굳은살,
운동장보다 교실 밖에서 더 빛나는, 말보단 행동을 믿는 소년.
“너희는 누구냐?”
“우린, 새로 온 아이들과 함께 ‘말의 씨앗’을 심으러 왔다.”
그들의 손엔 삐뚤빼뚤한 《조선어 문법책》과 《대한독립의 노래》 필사본이 들려 있었다.
두석은 그 틈에 서 있었다.
“내가 가장 먼저 깨우친 건 글자가 아니라… 눈빛이었다.”
며칠 뒤,
민족학교의 큰 잔치 날.
졸업생 선배들이 먼 길을 건너 학교를 찾았다.
그중 가장 많은 박수를 받은 이가 있었다.
김상진.
고등과정을 마친 후 만주로 넘어갔다가 귀향했다는 전설의 졸업생.
“저이가 김상진이야… 의병장 손자래. 총 쏘는 것도 배웠대!”
“오산학교, 보성학교에서 다 쫓겨났는데도 공부는 도가 텄대!”
그는 바다를 닮은 눈빛을 가진 청년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엔 ‘정렬의 기운’이 맺혀 있었다.
그날 밤,
두석은 마당 가장자리에 앉아 글을 쓰던 상진에게 다가갔다.
“선배님은 왜 다시 돌아오셨나요?”
상진은 웃으며 종이에 쓰던 글귀를 건넸다.
“하늘을 보라, 별은 다치지 않는다.”
조선인도, 말도, 이름도 마찬가지다.
“너희 중 누군가는 ‘지키는 자’가 될 거고
누군가는 ‘잊는 자’가 될 거다.”
그 말은 아직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두석의 가슴에 오래 남았다.
며칠 뒤, 세 친구는 학교 마당에서 ‘조선어 경연 대회’에 나갔다.
순형은 ‘독립신문 사설’을 외워서 낭독했고,
영재는 ‘망국의 노래’를 북소리에 맞춰 외쳤고,
두석은 어린 백성들의 말을 모아 자신이 직접 쓴 글을 읽었다.
“나는, 이름이 없는 말들이 별이 되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며칠후, 김상진은 섬을 떠났다.
“언제,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그리고 나는 나의 일을 시작하려 한다…
작가의 말
비밀의 섬, 소안도.
그곳은 교실보다 마당이 넓었고,
교과서보다 혼의 유산이 먼저 전달되던 곳이었습니다.
두석, 순형, 인석.
그들의 첫 만남은 순수하고 자유로웠지만,
이미 내면 깊숙이, 서로 다른 하늘 아래 태어난 사람들처럼
삶의 방향은 조금씩 다르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김상진.
그는 민족학교의 별이자, 불꽃이었습니다.
그가 남긴 말과 눈빛은
두석에게는 씨앗이 되었고,
순형에겐 그림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훗날,
모든 이야기를 갈라놓게 되리라는 걸
그때는 아무도 몰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