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핀 동백 17

문밖의 발자국

by 강순흠


1948년 3월 1일 새벽, 금당 육동리.
서중현은 고요한 바닷소리를 들으며, 밤새 써 내려간 쪽지를 호주머니에 넣었다. 쪽지엔 계원들의 이름, 그리고 바다 건너 연락망의 암호가 적혀 있었다. 그 순간, 마당 밖에서 나무계단이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서중현이 집에 있나!”
낯익은 목소리, 그러나 이제는 제복을 입은 목소리였다.
서중현은 눈을 감았다. 발자국이 마루에 올라섰다.
문짝 사이로 번쩍이는 총끝이 비쳤다.
그는 안방 쪽으로 발을 옮기다, 곧바로 뒷문으로 몸을 돌렸다.
마당 뒤편은 비탈길. 거기서 바다까지 이어지는 좁은 산길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발끝으로 흙을 차며 달리는데, 뒤에서 경찰의 고함이 터졌다.
“잡아라! 쏴!”
첫 발이 귀 옆을 스쳤다. 바닷바람에 섞여 화약 냄새가 밀려왔다.
두 번째 발이 등 뒤에 먹먹한 충격을 주었다.
몸이 앞으로 휘청이자, 그는 가까스로 땅을 붙잡고 무릎을 세웠다.
그때 멀리서 아들 서정웅이 달려왔다.
“아버지!”
서중현은 이를 악물고 손을 들어 아들을 막았다.
“오지 마라! 내가 넘어진 자리엔, 네가 서면 안 된다.”
경찰이 다가왔다. 숨이 거칠었지만, 그는 고개를 곧추세웠다.
“내가 누구인지 너희는 안다. 난 이 땅을 팔지도, 버리지도 않았다.
네 총은 나를 꺾을 수 있어도, 내 맹세를 꺾진 못한다.”
세 번째 발이 울렸고, 그의 시선은 바다로 흘러갔다.
하얀 파도가 절벽에 부딪치며 터졌다.
그 파도 속에, 그는 여전히 수의위친계 동지들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숨이 멎었다.

서중현의 시신은 그날 오후, 마을 사람들에 의해 육동리 공동묘지로 옮겨졌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렸고, 파도는 이상하게도 잔잔했다.
서정웅은 아버지의 호주머니를 뒤졌다.
그 안에서 작은 천 보자기가 나왔다.
보자기를 풀자, 바닷물에 젖어 번진 종이와 낡은 은화 세 닢, 그리고 조그만 나무판이 있었다.
종이에는 빼곡한 한문과 숫자, 그리고 ‘守義爲親契’ 글자가 번듯하게 쓰여 있었다.
옆에는 익숙한 이름들이 있었다.
마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이, 배를 만들던 이, 시장에서 나물을 팔던 이들.
아버지의 친구들이었다.
서정웅은 종이를 쥔 채, 문득 몇 해 전 들었던 아버지의 말을 떠올렸다.
“웅아, 사람은 이름만 남는 게 아니다. 네가 믿는 걸 지킬 때, 그게 네 생명이 된다.”
그 순간, 뒤에서 마을 노인 김노파가 다가왔다.
“그건 네 아버지가 목숨 걸고 지킨 거다. 저 글자 속엔, 이 바다를 살리고 지키려 한 사람들의 맹세가 들어있다.”
서정웅은 손끝이 떨렸다.
아버지가 지키려던 것은 단순한 목숨이 아니었다.
그는 바다와 마을, 그리고 이름 없는 동지들을 지키는 망루였다.
멀리 바다에서 고기잡이배가 귀항하며 뱃고동을 울렸다.
서정웅은 그 소리가 아버지의 목소리 같았다.
그리고 마음속 깊이 다짐했다.
“아버지, 그 길… 제가 이어가겠습니다.”

#작가의 말
서중현이 문짝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체포되던 장면에 두려움에 손끝이 유난히 무거웠습니다.
그 안에는 한 가정의 울부짖음과 마을의 숨죽인 공포가 함께 서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좌익 혐의’라는 말은 그 사람의 사상보다 더 무서운 낙인이었고, 이유를 막론하고 목숨을 앗아가는 구실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런 무거운 역사를 외면하지 않으려는 시도이며, 잊힌 이름들의 마지막 목소리를 오늘에 다시 불러오는 작업입니다.

서정웅이 아버지의 유품에서 ‘수의위친계’ 문서를 발견하는 이 부분에서 ‘서중현은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였음을 기억하고 그 영혼을 살리고 싶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지워진 사람들의 진짜 모습, 한 인간의 신념과 사랑, 그리고 그가 지키고자 했던 세상을 조금이나마 독자들에게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守義爲親契」(수의위친계)
• 守(지킬 수) → 지키다
• 義(옳을 의) → 의(정의, 도리, 의로움)
• 爲(할 위) → 삼다, 하다, 되다
• 親契(친계) → 친밀한 언약, 가까운 맹세, 혈육과 같은 결속
즉, “의(義)를 지킴을 친밀한 맹약으로 삼는다”라는 뜻입니다.
정리하면, 「守義爲親契」는
“의로움을 지키는 것을 가장 가까운 약속으로 삼는다. 정의를 지키는 것이 곧 가족을 잇는 참된 맹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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