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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한 삶과 깊어진 마음_흔들림 속에서 마주하는 나

과거에서 벗어나기

by 하서연

남편을 만나러 온 가족들과 간단하게 인사만 나눈 뒤, 남편은 냉온욕을 하기 위해 숙소로 돌아갔다. 가족들과 남편이 걸었던 맨발걷기 코스를 따라 걸어보기로 했다. 보이는 길만이 아니라 숲속으로 길이 길게 이어진 길을 걸으며 자연을 느껴보았다. 맨발걷기가 끝나고 가족들과 카페를 갔다. 간식을 먹고 아이들은 밖에 나가서 뛰어놀았다. 평소처럼 언니들과 앉아서 아무렇지 않은 척 이야기하지만 나는 뚝 떨어져 다른 세상에 와있는 것만 같았다. 언니의 말을 듣는데 무슨 내용인지도 잘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고 눈물을 참느라 애쓰고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다가 아이들의 나이에 대한 평범한 대화에 눈물이 툭 터지고 말았다.


넷째 언니가 뛰어노는 쌍둥이를 보며 말했다.
"우리 애들이 벌써 5살이야. 그런데 왜 이렇게 아기 같지?"

그 말을 듣던 셋째 언니도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아들은 4학년인데 아직도 아기 같아"

옆에 있던 나는 우리 아이들은 다 큰 거 같다며 말하려는데 눈물이 먼저 대답해서 말을 이어서 하지 못했다.

저녁을 먹고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출발했다. 출발한 지 30분쯤 지나니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잘 가고 있어?"

"아니. 언니들은 평소대로 형부가 운전하는 차 타고 가는데 나는 오빠 없이 혼자 운전해서 가려니 어색하고 허전하네"

"그럼 대리기사를 불러"

"내 전용 대리기사가 아프데"

남편도 마음이 불편했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뒤에 미래의 대리기사 두 명 있잖아. 졸지 말고 얘기하면서 가"

뒤에 있는 아이들이 눈치챌까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했다. 우리는 더 큰 행복을 좇느라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행복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평소 남편이 운전하는 옆자리에 앉는 것이 당연했고, 온 가족이 외출했다가 집에 같이 오는 것이 당연했지만 그 모든 게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돌아오는 길에 들린 휴게소에서 둘째 딸은 아무것도 사주지 않는다며 툴툴댔다.
"휴게소까지 들렸는데 아무것도 안 사줘?"

저녁을 먹고, 마트에 들려 젤리와 초콜릿까지 사 먹었는데 배가 고프네, 어쩌네 하면서 울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아빠가 보고 싶다며 더 크게 울었다.

"아빠 보고 싶어. 아빠가 없으니까 허전해. 핼러윈 파티 때는 아빠가 집에 왔으면 좋겠어. 아빠랑 같이 파티하고 싶어. 엄마, 아빠랑 같이 파티하는 애들은 좋겠다."

딸의 말을 듣다가 나는 화가 폭발하고 말았다.
"괜히 엄마한테 혼나니까 이말 저말 만들어내면서 울지 마. 엄마가 간식 안 사줘서 속상했다로 끝나야지 왜 감정을 키워? 우울해 있으면 뇌는 우울한 이유를 찾아서 더 우울하고, 불안하고, 걱정하게 만들어. 인사이드 아웃 봤던 거 기억나지? 내가 어떤 감정 상태인지에 따라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이 바뀌는 거."

딸은 내 말을 듣더니 울음을 멈추고 조용해졌다. 그리고 한참을 생각해 보니 그 말은 나에게 해줘야 할 말이었다.

재발한 거 안지가 두 달은 됐는데 아직까지 감정에 잠식돼서 올라오지 못하고, 이러면 어쩌나 저러면 어쩌나, 나는 어쩌나 하면서 감정을 키워가고 있었다. 나는 바뀐 상황을 온전히 인지하지 않고 과거와 비교하고 지금의 나를 인정하지 않았다.

남편은 요양병원에서 최상의 컨디션으로 최고의 치료를 잘 받고 있으니 나도 내 삶을 살아야 한다. 아이 덕분에 나도 결심을 했다. 과거에 살지 않고, 어려운 시간 속에서도 조금씩 현재를 마주하고 인정하며, 주어진 시간 속에서 행복을 발견하고 감사하며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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