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걸레질의우아미

나의 매일을 빛나게 만들어봐요, 예쁘니까 좋잖아.

by 고갱이

"마른걸레를 써보세요. 집안 곳곳이 윤택해진답니다."


어느 날 마담 B가 말했다. 전라도 광주가 고향인 마담 B는 양장점을 운영하는 어머니의 지휘 하에 살림꾼인 외할머니 밑에서 맏딸로 자랐다한다. 그래서인가 그녀는 다분히 가부장적인 가족과 살면서도 순종이 아닌, 예의를 지키며 산다. 저항 대신, 평화와 조화를 추구한다.


마담 B는 물 한 컵도 따라줘야 하는 남편과 큰 트러블 없이 2020년 대한민국을 살고 있다. 같은 여자이자 어른인 어머니와 할머니로부터 매사에 단정하고 차분한 성정을 배운 덕인 것 같다. 마담 B가 가부장적인 남편과 사는 방법은,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남편은 "여보, 나 물 좀..."이 아니라 "물 줘."라고 한다. 그전에, 그러니까 그가 '명령'을 내리기 전에, 미리 물 한 컵을 따라 놓는다. 20년이 넘도록 함께 산 사람이니 이쯤 되면 이 사람이 물을 달라 하겠군 하는 순간 정도는 알 수 있다. 그녀는 남편이 입을 열기 전, 메이드 인 재팬 실크 뜨개실로 직접 뜬 컵받침을 깔고 사랑스러운 베이비 핑크 빛이 도는 영국산 본차이나 머그에 생수를 따르고 미키마우스가 조각된 크리스털 컵 뚜껑을 덮어서 테이블 위에 둔다. 오해하지 말자. 마담 B가 남편에게 물 한 컵을 이리 주는 것은 단언컨대 거안제미(擧案齊眉)가 아니다.


"언니는 왜 물까지 그렇게 따라줘요?"내가 물었다. 어지간히 맹한 표정이었을 것이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지, 감조차 잡기 힘들었기에.

"물 달래매? 그래서 물 줬어. 컵도 내 맘대로 선택 못해? 그건 아니지요. 그 컵이 싫고 자기가 원하는 물 따르는 방식이 있으면 직접 따라 마시던가. 처음에 물 달라길래 이 남자가 물도 못 따라 마시는 바보 인가했지. 난 물정도는 따를 줄 아니까 따라줬어요. 내가 물을 따르니까 내가 원하는 컵을 선택할 뿐이고, 난 물을 그 컵에 따르고 싶어서 샀고. 뭐가 문제지?"

"와우." 나는 그저 그녀의 영민함에 탄복할 뿐이었다.
"내가 따라 준 물이 그렇게 마시고 싶으면, 내가 물을 따르고 싶을 만한 컵을 사 오면 돼. 아님 사든 지 말든지 내버려 두든가. 그럼 나는 얼마든지 물을 따라 줄 거라니까? 아름다운 컵을 샀으니 많이 써줘야지. 나는 내가 예뻐서 산 컵을 많이 보고 만질 수 있으니까 좋아요.'
"옳습니다."
"나쁘지 않잖아요. 좋잖아."

마담 B의 부엌살림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예쁜 것도 예쁜 것이고 그 가격도 가격이지만, 내일모레 50을 바라보는 작은 체구의 여자 혼자서 감당할 수 있으리라 믿을 수 없을 만한 양이다. 이 많은 것들을 어떻게 관리하냐는 나의 놀람에 별 것 아니라는 듯 웃는다. 하지만 20년이 넘는 결혼 생활 동안 하나둘씩 모은 식기류 하나하나에서 살림에 대한 그녀의 애정과 정성이 느껴졌다. 지긋지긋한 식구들 밥이나 하고 산다는 주부 특유의 자학과 자책이 아니라, 자신의 매일에 성심을 다하며 살고 있는 노력이 보이는 듯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가능하도록 직접 돕는 것은 마담 B의 재력이겠지만 딱히 그것만으로 핑계를 돌리기에는 어려웠던 것이, 10년 넘게 쓰고 있다는 머그컵 세트가 이 하나 나가지 않고 새것처럼 반짝거렸기 때문이었다. 한 번씩 집에 놀러 갈 때면 그녀는 백화점에서도 한번 본 적 없는 아름답고 고급스러운 잔에 이런저런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려주거나 금빛 거름망으로 차를 우려내 준다. 끓인 물의 온도를 재고 적정량의 물을 계량하여 붓는다. 나 같으면 귀찮아서라도 대충 할 과정인데, 마담 B 표정은 전에 없이 진지하기만 하다. 딱히 내가 좋기 때문이라거나 나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 시간에 최선과 성의를 다하는 마담 B만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었기에 나는 하지 말라고 말리는 대신 향기로운 차와 예쁜 다기를 한껏 즐김으로 보답하곤 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이토록 우아한 마담 B를 못 만난 지 벌써 여러 달이 지났다.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오늘 아침, 청소를 하다가 마른걸레 팁이 기억났다. 마담 B에게는 십여 년째 집안일을 도와주는 아주머니가 계신데, 마른걸레의 사용은 청소의 달인인 이 도우미 아주머니가 마담 B에게만 알려준 팁이었다. 영업상 극비일지도 모르는 이 정보를 이렇게 공개해도 될까 모르겠다.

1. 샤워 후 화장실 안에 습기가 자욱할 때 마른걸레로 거울, 실리콘, 세면대 수전, 변기 위 등을 닦으면 따로 세제를 쓸 필요가 없이 말끔하고 뽀송하게 닦인다.

2. 더운물로 바닥청소를 한 뒤 걸레로 문이나 욕조 위를 닦고 문을 활짝 열어두면 습기가 빨리 마른다.

3. 창문이나 거울을 닦을 때 오른손에는 젖은 걸레 왼손에는 마른걸레를 들고 젖은 걸레가 지나간 길을 이내 마른걸레로 한번 따라 가면 얼룩이 생기지 않아 윈도 워시 같은 것을 뿌릴 필요 없다.


4. 싱크대 위도 마른 행주질을 한번 더 해주면 실리콘에 곰팡이가 필 일 없다.


5. 매일 하면 쉽고 빨리 끝난다.

등등 어느 날 산책길에서 마담 B는 아주머니에게 들은 마른걸레 예찬을 펼쳤다. 걸레 얘기를 하는 마담 B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도 신났었다.

보고 싶어요, 마담 B.

이사로 함께 살던 그 동네를 떠날 때나 코로나로 거리두기가 계속되어도 무엇 하나 아쉬울 것 없이 사는 나인데 당신을 못 만나는 것은 몹시 섭섭하군요.

나는 우아한 마담 B를 생각하며 마른걸레로 쓸만한 예쁜 수건을 찾았다. 무심한 듯 시크한 칼라로 색을 조합하여 최고급 뜨개실을 이용해 뜬 수세미를 쓰는 마담 B는 혹시 프랑스 자수가 놓인 낡은 손수건으로 걸레질을 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 그랬다간 그녀의 십년지기 아주머니가 걸레로서의 효용가치를 논하며 호통을 칠 것 같긴 한데. 나는 뭘로 할까, 뒤적거리다가 복숭아가 유치원 시절 기관에 갖고 다니던 손수건을 발견했다. 연분홍 바탕에 노오란 나비 한 마리가 수놓아져 있는 100% 순면 수건. 벌써 5년 넘게 지난 것이지만, 당시 어지간히도 푹푹 삶아댔던 것이지만, 구멍 난 곳 없이 보송보송해서 여전히 감촉 좋고, 무엇보다 기똥차게, 예쁘다.

샤워 후 김서린 거울과 세면대 위 등을 싹 닦고 변기 뚜껑 위에 잘 펴서 널어놨다.
화장실 안에 봄이 온 듯하다.
노란 나비가 팔랑팔랑 날아다닌다. 날갯짓이 우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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