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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갱이 Aug 23. 2023

고양이가 왔다

닭과 개 사이 어디쯤 고양이

일요일 오전, 봄이가 잔다.

침대 한가운데에서 만세를 하고 쿠아쿠아 잔다.


고등학교 1학년이 되던 겨울, 집에 눈도 제대로 못 뜨는 강아지가 왔다. 오빠가 코트 주머니에 넣어 데리고 왔다. 친구 집 마당에서 키우는 개가 새끼를 낳았는데, 다른 새끼들은 죽었다던가 다른 데로 새 주인 찾아갔다던가, 그렇게 마지막으로 남은 한 마리라 했다.


당시 나는 집에서 키우는 동물에 트라우마가 있었다. (그때는 트라우마라 생각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분명 트라우마다.) 어렸을 때 시골 할머니 집에 갔다가 마당 닭에게 공격을 받았다. 그렇게 사납고 무서운, 야생의 눈은 지금까지도 보지 못했다. 닭은 어슬렁거리며 나를 노려봤다. 어디선가 읽은 대로 눈을 마주치지 않고 움직임을 최대한 작게 하여 부들부들 마당을 지나고 있었는데, 본능적으로 상대의 나약함을 눈치챈 닭은 그대로 날아올라 발차기를 날렸다. 무려 두 마리였다. 대청마루에 앉아 엉엉 울었지만 아무도 나를 위로하러 와주지 않았다. 위로는커녕, 아빠는 인간들이 먹다 남긴 수박 껍질이 쌓인 쟁반을 주며 닭장에 뿌리고 오라 했고, 나는 무서워 싫다고 했다가 욕을 얻어먹었다. 그 뒤로 나는 동물을 몹시 싫어하는 청소년으로 성장했는데, 그만 집에 개가 온 것이다.


새끼 강아지를 데리고 올 것이라는 오빠의 말에 나는 데려 오기만 해 보라고, 방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머리가 나빠도 너무 나빴다. 내가 방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개를 방 밖으로 못 나오게 했어야 했는데. 내가 방 밖으로 나오든지 말든지 전혀 관심 없는 오빠는 하얀 강아지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엄마는 접시에 우유를 담아 주었고 아빠는 동네 슈퍼에서 사과 상자를 얻어와 뒤집어서 문을 뚫고 개 집을 만들어줬다. 개들은 이렇게 좁고 어두운 공간을 편안해한다고.


이름은 다롱이라고 짓기로 했다. 다롱이는 단단히 똥개였다. 오빠는 부득부득 어미가 몰티즈 순종이라고 우겼지만, 그렇다 한들 세상에 반만 똥개인 것은 없다. 아무리 배에 약 8cm가량의 너비로 동그랗게 나있는 보드랗고 빛나는 털이 어미의 혈통을 증명해 준다 해도, 그냥 똥개다. 동그랗고 까만 두 눈이 똘망 똘망 세상 영특해 보여도, 똥개다.


금방 새끼 티를 벗은 다롱이는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사과도 먹고 건빵도 먹었다. 갈비뼈도, 족발 뼈도 먹었다. 사료든 개 껌이든 가리지 않고 먹고, 먹다가 배부르면 토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다시 달려들어 먹을 것을 달라고 짖었다. 핑크색과 연두색이 섞인 목줄을 사다 목에 묶어 산책을 시키러 나갔다. 다롱이는 아스팔트 바닥에 배를 딱 붙이고 꿈쩍하지 않았다. 안아 올리면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나는 가끔 집에만 있는 다롱이에게 바깥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베란다로 안고 나가 창문을 열고 아래층을 보여줬다. 우리 집은 9층이었고, 강아지의 작은 심장은 정신없이 쿵쾅쿵쾅 요동을 쳤다. 엄마나 오빠가 외출하면 현관 스토퍼 앞에 납작하게 엎드려 기다렸는데, 나는 내가 나갔을 때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나도 기다려 주는지 궁금했지만, 굳이 다른 식구들에게 물어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음 해 봄방학을 앞둔 어느 날, 학교 끝나고 집에 오니 다롱이는 없었다. 엄마는 대학교에 합격한 오빠를 데리고 외갓집에 갔고, 아빠는 오빠의 수능이 끝났으니 마당 있는 집으로 개를 보냈다고 했다.


그날 밤 내가 혼자 얼마나 울었는지 알아요? 새벽까지 울다가 잤는데 아침에 우리 아빠는 그렇게 수북하게 쌓인 휴지를 보고도 아무 말 없이 회사 간다고 나가버리고, 다음 날 집에 온 오빠는 '진짜 없네, 진짜 없어.'라고 했어요.


나는 4년 전 9월, 동네 술집에 앉아 그날 처음 만난 사진작가에게 엉엉 울면서 개의 얘기를 했다. 17살 겨울 5시간 동안 흘린 크리넥스 한통 분량의 눈물은 마흔의 가을이 되도록 남아있었다. 냅킨 한통 분량으로.


우리 집 식구들은 내가 지금 다롱이를 생각에 울면서 살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겠죠. 아예 잊어버렸을 거예요. 우리 다롱이 배에 털이 얼마나 고급스러웠는 줄 알아요? 걔 엄마가 몰티즈 순종 이랬어요. 귀족이었다니까. 말이 좋아 시골 마당집이지 뻥까지 말라 그래. 잠깐 산책도 못하는 애가 어떻게 땅바닥에서 살 수 있겠어요?


내 주정에 묵묵히 술을 마시던 사진작가는 아무에게도 한 적이 없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나는 계속 울면서 얘기를 들었다.


다롱이가 우리 집에 왔을 때만큼 쌀쌀한 어느 날, 나는 봄이를 만났다. 봄이는 내 앞에서 뽐내듯 앉아 그루밍을 하고 있었다. 고양이의 배가, 하얬다. 검지 손톱만큼 작은 혓바닥에 뱃가죽은 사정없이 밀려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은 불안함이 느껴지는 연약한 배였다. 쇠털인가 싶을 정도로 누렇고 뻣뻣한 등과는 정 반대로 하얗게 반짝거리던 다롱이의 배가 생각났다. 다롱이 배도 저렇게 조그맣고 하얗고 약해 보였다. 배에 손가락을 살짝 갖다 대보니 고양이는 눈을 치켜뜨고 나를 노려본다. 마당에서 나를 공격하던 닭의 눈빛만큼 날 것이었고, 우리 다롱이만큼 크고 동그랬다.


나는 코트 주머니가 아닌, 이동장에 봄이를 옮겨 집으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2년째같이 살고 있다. 겨울이면 털이 보글보글 나지만 여름이면 그나마 있던 털도 많이 빠지고 없는, 데본렉스 종이다. 이는 어디까지 등과 꼬리에 한한 얘기다. 배는 사시사철 털이 없다. 이 배를 조몰락조몰락하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경을 칠 것이니 꾹 참아야 한다. 그냥 보고만 있다가 정 못 참겠으면 살짝, 검지를 조심조심 갖다 댔다가도, 하나 둘 셋 얼른 손을 떼야지 안 그러면 여섯 살 시골집 마당에서 만난 닭의 공포를 아주 생생하게 느끼게 된다.


일요일 오전, 침대에 기대앉아있는 내 옆으로 다가와 벌러덩 누워 만세를 하고 쿠아쿠아 자는 봄이를, 살구빛을 띤 아기 엉덩이 같은 그 배를, 나는 만지고 싶어 참느라 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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