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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갱이 Aug 25. 2023

아름다운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야생의 본능을 찾아라    


고양이는 처음인 데다 고작 빌린 책 몇 권, 유튜브 영상 몇 편이 고양이에 대해 아는 것의 전부인 내가 뭘 얼마나 알겠냐마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고양이와 산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인 것 같다. 앞에서도 썼다시피 강아지와 달리 고양이는 가축화되지 않은 동물이다. 가축이라 하니 소, 돼지, 닭이 먼저 떠오른다. 예전에는 축산과 사역에 이용되는 동물을 뜻했다지만, 나는 현대 도시 생활에서 가축(畜)이라는 단어를 한자 그대로 집안에서 사람과 함께 사는 동물이라는 의미로 쓰고 싶다. 그러니까 요즘 가축은 반려동물이다.  


흔히 고양이는 가축화되지 않은, 야생성이 강한 동물로 분류된다. 실제로 다수의 고양이들은 야생에서 일생을 보낸다. 그리고 일부 브리더가 관리하는 고양이나 임신한 상태에서 집사를 만난 고양이는 태어남과 동시에 사람과 함께 생활하며 보살핌을 받고 있다. (여기서 보살핌은 임신, 출산, 육아 등 번식과 먹이와 잠자리 등 생존에 필요한 인간의 물리적 손길을 뜻한다. 그 손길의 의도가 순수한 사랑인지 돈인지는 구분하지 않았다.) 혹시 대대손손 나면서부터 인간과 함께 생활한, 특히 품종묘들은 야생 고양이보다 가축화되지 않았을까? 사람과 유대감을 형성하며 함께 사는 가축(畜)으로 말이다.  


고양이 글을 읽다 보면 종종 품종묘 별로 특징을 나열한 정보가 보인다. 유난히 몇몇 종에서 무릎냥이나 개냥이 같은 문구가 눈에 많이 띈다. 고양이를 처음 키워보는 나는 그 방법이 궁금하여 데본렉스에 대한 설명을 좀 찾아보았는데, 이 역시 개냥이라는 평이 많았다. 가만 보니 털이 짧고 가는 종일수록 사람을 좋아하고 잘 따른다는 설명이 많이 달려있다. 이는 종특이랄 것이 없다. 이들은 추위나 더위 같은 다양한 외부 자극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줄 ‘털’이라는 보호막이 거의 없는 존재다. 살기 위해서 어떻게든 인간 옆에 붙어있어야 한다. 사회성이 발달한 것이 아니라, 그저 연약한 동물의 생존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야생묘건 품종묘건 고양이는 본능이 강한 동물이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봄이는 소파 쿠션에서 웅크리고 자고 있는데, 그 모습이 너무 추워 보여 담요로 덮어주고 왔다. 이 고양이는 한 겨울 22~23도가 유지되는 집 안에서 살면서도 환기를 위해 잠깐이나마 창문을 열면 번개같이 극세사 털로 덮여있는 숨숨집으로 숨는다. 혹은 컴퓨터를 하고 있는 남편의 플리스 속으로 들어간다. 그럴 때마다 그는 불룩해진 배가 자랑스러워 혼자 어쩔 줄 몰라한다. 절대 좋아서 들어간 것이 아닌데도.


어느 날, 고양이와 놀던 복숭아가 나에게 고양이의 속마음을 말해주었다. 복숭아는 야생 고양이들의 패싸움을 그린 <Warriors>라는 소설을 좋아한다. 이야기 속 고양이의 생리로 추측하건대, 봄이는 집고양이라고 자신의 상황을 마냥 편안해하거나 고마워하진 않을 것이란다. 그만큼 독립적인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얘는 사랑이란 개념조차 없을지도 모르지." 


야생 고양이라서 괴롭다거나 자유롭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고양이들은 집이냐 야생이냐 선택에 호불호를 나누지 않을 거야." 소설에서 집고양이였던 주인공은 가출해서 야생 고양이가 되는데, 그는 집을 나온 것을 후회하지도 야생으로 나오길 잘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양쪽 세계 모두 그냥 현실일 뿐이고 고양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여 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야생 고양이의 수명은 4~5년인데 반해 집고양이는 15년쯤 된다고 한다. 하지만, 고양이가 어느 쪽을 선택할지 인간은 절대 모를 일이다. 집안에서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오래오래 살고 싶은 욕망,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것 아닐까. 고양이는 쾌적하고 여유로운 환경을 베푸는 사람의 정성과 보살핌에 딱히 관심 없어 보인다. 그들은 그저 오늘 하루가 배고프지 않고 춥지 않으면 충분하다.


나는 그 증거가 몇 가지를 봤다. 봄이는 더 잘 살기 위한 계산을 하지 않는다. (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는 간식을 얻기 위해 올라가기 가고 싶지 않은 곳을 향해 점프를 한다던가, 발톱을 숨기지 않는다. 함께 사는 인간은 익숙한 냄새를 풍기기 때문에 그저 경계할 필요가 없는 편한 존재일 뿐, 딱히 좋아죽겠다는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다. 그리고 대대로 야생의 생활은 단 하루도 안 해본 주제에 하루에도 몇 번씩 사냥감을 노린다. 사료를 배불리 먹은 상태에서도 봄이는 사냥을 매우 무섭게 한다. 한 번씩 낚아챈 장난감 깃털이나 박스를 물어뜯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당장 내 눈앞에 시뻘건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것 같다. 


이토록 충만한 독립 본능은 강한 자기애와 연결된다. 귀여운 발, 사랑스러운 뒤통수, 낭창한 꼬리. 생김에 반해 가까이 다가가려 할 때, 그 사람이 아침저녁으로 화장실 청소를 해주고 낚싯대를 흔들어주고 시간 맞춰 닭고기 사료를 바치는 사람이라 해도, 귀찮으면 칼같이 밀어낸다. ‘당신은 내가 만져지고 싶을 때만 만질 수 있어.’라고 온몸으로 강하게 말한다. 은혜나 보은이 인간의 기본 도리라 주장하는 전래동화를 읽고 자란 한국인인 내 눈에는 이처럼 천하의 배은망덕한 놈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일이 반복되던 어느 순간, 이 작은 생명체의 씩씩함 그 도도함이 한없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따지고 보면 봄이는 나에게 집으로 데려가 달라, 얼마짜리 사료 무슨 맛 간식을 사 오라, 어떤 장난감을 주문해 달라... 요구한 적 없다. 심지어 편식도 하지 않는다. 주는 대로 먹는다. 나의 음식을 탐하지도 않는다. 하나에서 열까지 내가 일방적으로 원해서 데려와 살고 있고 모든 것들은 내 마음대로 제공하는 것이다. 봄이는 나에게 고마워할 필요도 없고 잘 보이려고 애교를 떨 필요도 없다. 싫고 귀찮은 손길을 애써 참고 견딜 필요도, 없다. 그래서 자신의 언어로 표현한다. 만지지 말라고.


이 같은 솔직함은 배려, 예의, 체면, 도리, 인내로 점철된 인간 세계에서는 좀처럼 느끼기 어려운 감정이다. 인간에게는 이미 사라진 야생본능인 걸까? 고양이와 인간은 같은 동물계다. 먼 옛날 야생에서 살다 간 인류의 조상은 어쩌면 고양이만큼 독립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고양이처럼 씩씩하고 도도하게, 세상의 갖은 호의와 친절에 현혹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흥! 을 외치는, 아름다운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손등에 선명하게 나있는 봄이의 이빨자국을 들여다본다. 사회화 문명화 같은 미명 하에 습득된 규범 안에서 내가 추구하던 가치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이었나. 그것들은 과연 나라는 개인이 행복하게 사는 데에 도움을 주었나. 그저 나를 눈치 보고 움츠려 들고 나약하게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가장 쉽게 다친다. 내가 사회생활이 지치고 힘들 때를 돌아보면, 스스로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을 경우가 많았다. 이제, 잠자고 있는 나의 야생 DNA를 깨워볼까. 그것은 내가 나의 행복을 주장하고 요구하는 것이다. 고양이처럼 단호하게 내 생각과 마음을 드러내 보인다면, 초반에 상대는 당황할 것이다(나처럼). 서운하고 섭섭하다며 화를 낼지도 모른다(역시 나처럼). 분노로 날뛰거나 죄책감을 뒤집어 씌우려 들 수도 있다(그러니까 나처럼). 하지만 그가 진심으로 나와의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나라는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해 볼 것이다. 내가 봄이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그렇게 서로 더 나은 관계가 되어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나의 행복이 만들어지는 ‘어마어마한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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