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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갱이 Aug 28. 2023

"꽃이 예쁘니까 우리 사진 한 장만 찍어줘요."

가족이 되기 위해 필요한 시간 


유튜브 알고리즘 추천으로  <인어 할머니와 선장> 이라는 생활다큐 한 편을 보았다. 주인공인 해녀는 91세 꼬부랑 할머니다. 평생 물질만 하며 살아 온 할머니는 육지에서는 작은 몸 하나 제대로 가누기 힘들만큼 허리가 굽었다. 그녀의 집으로 어느 날, 고양이 한 마리가 들어온다. 그리고 며칠 후 부엌에서 새끼 네 마리를 낳았다.


마당은 이미 커다란 개 순둥이와 이름 없는 떠돌이 개 한 마리가 차지하고 있었고, 할머니는 갑작스러운 고양이들의 등장이 영 마뜩잖다. 하루에도 몇 번씩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며 구박하는데, 그에 맞서 버티는 어미 고양이의 모성애도 만만치 않다.


어느 날, 마당의 떠돌이 개가 새끼를 낳을 기미를 보이자 할머니는 급히 선장을 불러 성공적인 해산을 위한 작전을 도모한다. 어미 고양이의 공격으로부터 새끼 강아지를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엄한 순둥이까지 끌고 와 밤새 산모견 옆에서 보초를 서게 하는 등 태어날 생명을 지키기 위한 노인과 선장의 노력은 진지하고 비장했다.


이렇게 해놓지 않으면 진짜 무자비한 살육이 벌어진단 말이야, 오늘 밤에.

고양이들은 하루가 멀다 않고 집안에서 치밀하고 치열한 생존투쟁을 벌인다.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오는 것은 당연하고, 옷장이니 이불장이니 가리지않고 오르내리며 우다다다 날뛴다. 싱크대 위에 잘 놔둔 고기나 생선은 돌아서면 사라지고 또 사라진다. 그래도 할머니는 어미가 제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동해 부러 생선국이나 고깃국을 끓여 고양이들 앞에 내미는데, 그들은 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각종 범죄행각을 서슴치 않고 벌이는 것이다. 그날도 새끼 냥이들은 약올리듯 눈앞에서 꽁치 한 마리를 통째로 물고 도망갔다. 체념한 할머니가 어미에게 애원했다.

새끼들 다 데리고 어디 좋은 곳으로 그만 가.
가서 맛있는 거 많이 얻어먹고 편하게 살아.
 

다음 날, 다섯 마리가 전부 사라졌다. 할머니는 하루 종일 집안 곳곳을 뒤지며 야옹야옹 불렀다. 어디에서도 고양이들은 나오지 않았다. 선장이 그 모습을 보고  "있을 때는 귀찮다 하더니 막상 없어지니까 허전합니까?" 놀리듯 묻는다. 할머니는 울먹거리며 얘들이 어디 가서 다치진 않았나 밥은 굶지 않았나 걱정이 돼 죽겠다고 한다. 그 마음을 알았는지, 집 나가봤자 고생이라는 것을 배웠는지, 다음 날 어미 고양이는 새끼 넷을 모두 데리고 다시 돌아왔다. 반가운 할머니는 돼지고기를 삶아 똑같이 셋으로 나눴다. 그리고 갓 지은 밥을 비벼 식힌 뒤 한 그릇은 개들에게 또 한 그릇은 고양이들에게 주고, 당신은 김치를 넣고 좀 더 졸여 드셨다.


촬영이 끝났다.  할머니는 배웅길 마당에 서서 "꽃이 예쁘니 개들도 같이 나오게 사진 한 장만 찍어줘요." 촬영팀에게 부탁하셨다. 행복이 별것이던가. 길가에 핀 예쁜 꽃을 보기 위해 걸음을 멈추고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행복이다. 궂은 날씨에는 천방지축 날뛰는 생명을 집안으로 들여 비바람을 막아 주고, 내 배가 고파 밥 먹을 때면 새끼 낳은 어미의 주린 배도 생각하고, 그리고 그들 옆에 말없이 앉아 함께 예쁘게 핀 꽃을 바라보는 것. 이렇게 가족과 함께 한다면 우리는 이제, 충분히,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고양이와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매일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다. 요즘은 반려동물 시장의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 놀라고 있다. 사료 종류만 해도 생산국가별 금액별 주재료별로 엄청 많은 데다 건식이니 습식이니 간식이니... 심지어 영양제까지. 생활용품들까지 생각하면 머리가 빙빙 돈다. 딸을 임신하고 처음 육아용품 박람회에 갔을 때 받았던 충격과 비슷하다. 똑똑한 선배맘들이 이런저런 전문가적인 식견을 쏟아놓듯 인터넷 카페나 유튜브 영상도 기상천외한 제품들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하다. 듣다 보면 너무 어렵고 복잡해 무릎 꿇고 받아 적어야 할 것 같아, 나는 가만히 창을 닫는다. 가슴이 답답해진다. 동거묘에게 이렇게까지 해줘야 하는 건가?  이런 것을 해줘야 고양이를 키울  자격이 있는 것인가. 


나는 해녀 할머니가 "얘들 고기 줘야겠다." 중얼거리며 양은 냄비에 고기를 끓여 한 국자 덜어내 입으로 후후 불고, 밥솥에서 퍼낸 밥도 한 번 더 후후 불어 개와 고양이에게 나눠준 뒤 마지막으로 김치를 넣고 당신의 식사를 다시 끓이는 모습이 바로 인간과 동물이 가족으로 사는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고양이와 산다는 것은 정말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나의 반려 동물이 고양이어서가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생명이 나에게 왔기 때문이었다. 십여 년 전 나에게 딸이 왔던 것처럼.


딸의 등장으로 나의 가족 형태는 기존과 완전히 달라졌다. 하루아침에 생활이 180도 달라진 우리는 이 어색함이 익숙해질 때까지 많이 울고 웃었다. 그리고 10여년이 지난 현재 우리 셋은 서로의 숨과 같은 가족이 되었다. 힘들게 익숙해진 그 공간에 또 다른 생명의 등장은, 딸만큼은 아니지만, 꽤나 어색하고 불편한 일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느껴졌던 것이 아닐까. 평생 자연과 함께 살아온 덕인지 긴 세월 동안 온갖 평지풍파를 버텨냈기 때문인지, 그 노쇠한 몸으로도 단 며칠 만에 다른 생명과 함께 삶을 자연스럽게 걷기 시작한 할머니가 부러웠다. 조그만 고양이 한 마리 등장에 호들갑을 떨었던 내가 부끄러워진다.


가족으로 함께 살기 위해서는 먼저 서로에게 편안해져야 한다. 불편한 존재와는 함께 살기 힘들다. 어젯밤에 딸은 자꾸 공부하는 문제집 위로 올라오는 고양이에게 화를 냈다. 나는 왜 애꿎은 고양이에게 화를 내냐고 화를 냈고, 딸은 그럼 화가 나는데 어떻게 하냐고 또 화를 내고, 나는 지금 넌 공부하기 싫은 화풀이를 고양이에게 하고 있는 거라고 화를 내고... 우리가 방문 닫고 들어가 버리면 봄이는 문 앞에 앉아 당장 열라고 뻬옹뻬옹 화를 낸다.


막상 그 순간에는 아이고, 이 노릇을 어쩌나 싶다. 하지만 이렇게 지지고 볶는 시간이 지나야 익숙해지고 익숙해져야 가족이 되지 않겠는가. 해녀 할머니는 오죽 괴로우셨으면 고양이들을 내쫓아버렸다. 어미가 새끼들을 데리고 가출했다 돌아온 뒤에야 비로소 그들은 완전한 가족이 되었다. 그러니 초보 집사야, 고양이가 잠만 자고 하품만 하고 골골거리기만 하는 존재가 아님을 빨리 받아들여라. 우리는 봄이를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아직 몸으로는 이해 못 하고 있다.


고양이는 세상 모든 것이 인간을 섬겨야 한다는 정설을 깨뜨리고자 세상에 왔다 - 폴 그레이

고양이는 우리에게 세상 모든 일에 목적이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 개리슨 케일러

이 세상에서 완벽한 미학을 두 개만 꼽으라면, 시계 그리고 고양이 - 에밀 샤르티에

한 마리의 고양이는 또 다른 고양이를 데려오고 싶게 만든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태초에 신은 인간을 창조했으나, 인간이 너무나 나약해 보여 고양이를 주었다 -워런 에크테인

인생에 고양이를 더하면 삶은 무한해진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만약 개가 당신 무릎 위로 올라갔다면 당신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양이가 같은 행동을 한다면 그저 당신 무릎이 다른 곳보다 더 따뜻하기 때문이다 - A.N.화이트헤드

개는 스스로를 사람인 줄 안다. 고양이는 스스로를 신이라 여긴다. - 미국속담

고양이와 함께하는 시간은 절대 낭비되는 시간이 아니다 - 콜렛

인생의 시름을 달래는 두 가지가 있다면, 음악 그리고 고양이다 - 알베르트 슈바이처

고양이는 세상 모두가 자기를 사랑하길 원하지는 않는다. 다만 자기가 선택한 사람이 자기를 사랑해 주길 바랄 뿐 - 헬렌 톰슨

아무리 긴 시간이라도 좋은 고양이에 대한 기억을 지울 수는 없다. 아무리 긴 테이프라도 집에 있는 고양이 털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 리오 드워캔

만약 고양이가 나무에서 떨어지면 집 안에 들어가서 웃도록 하라 - 페트리샤 히치콕

고양이는 누가 자기를 좋아하고 누가 자기를 싫어하는지 안다. 그러나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 - 위니 프레드 카리에르

한 동물을 사랑하기 전까지 우리 영혼의 일부는 잠든 채로 있다 - 아나톨 프랑스


* 인용 :  <고양이가 기다리는 집으로 가고 싶어>  예문 아카이브



EP.

어젯밤 남편의 귀가가 늦었다. 자정이 다 되었을 때 현관문에서 도어록 소리가 들리자, 내 무릎에서 골골거리며 자울자울 하던 봄이 귀가 쫑긋 서고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문이 열리고 남편이 신발 벗을 때는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 고양이는 막상 남편이 앞에 마주 서자 갑자기 90도로 방향을 틀어 다른 곳으로 간다. 온몸으로 "난 당신을 마중 나온 것이 아니야! 난 당신을 반가워하고 좋아하고 막 그러지 않아!"라고 외치는 듯했다. 속으로 마중 나간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같은 눈치에 혼자 빵 터져서 웃었다. 하지만 모르는 척해줬다. 나는 예의가 바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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