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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갱이 Aug 29. 2023

교감, 그 절묘한 타이밍

 함께하는 순간은 행운이다

 

고양이의 이름을 지을 무렵, 계절은 봄이었다. 동백이, 동매, 동자... 제임스, 윌리엄, 빌...  달래, 나리, 밤이, 달이... 기억도 안 날 만큼 많은 이름이 오가다 이제 곧 봄이니까, '봄'으로 하자.


봄.

봄아.

입에서 '봄아'라는 소리가 나올 때마다 뱃속이 간질거린다.


여섯 살 어느 날, 살구색 원피스가 생겼다. 꽃샘추위를 아랑곳 않고 입고 나갔다 감기에 된통 걸려 앓아누었는데, 그 와중에도 벗을 수 없었던, 정말 예쁜 원피스였다. 그 원피스에 달려있던 레이스와 꼭 닮은 고운 들꽃을 모아 엄마 선물이라고 내밀던 어린 딸이 생겼다. 그때 아이는 흙이 묻어 꾀죄죄한 연보라색 바지를 입고 있었지. 나에게 봄이 간지러운 이유다.


우리는 운명처럼 길 가다 마주친 사이도 아니고, 죽어가던 생명을 구조한 은인 관계도 아니다. 나는 봄이를 품목란에 '고양이용품'이라 적힌 영수증과 함께 건네받았다. 하지만 이 또한 인연이다. 매년 봄맞이를 하며 함께 꽃을 볼 인연. 겨울이 지나 창문을 열었을 때 부드러운 바람이 들어오면, "우리 봄이가 올해도 봄을 불러왔네." 라고 말하며 볼을 쓰다듬는 사이.


이렇게 마냥 사랑스러울 것만 같은 봄이가 이른 아침, 화장실에 있는 딸의 액세서리 통을 바닥으로 밀어 쏟았다. 매일 쓰는 머리핀과 고무줄이 가득 담긴 플라스틱 통이었다. 우당탕 소리는 두 번 세 번 이어졌다. 밥 먹다가 화장실로 뛰어간 아이는 구시렁거리며 핀 통과 빗, 로션 등 떨어진 물건을 제자리에 올려 두었다. 돌아와 숟가락을 드는 찰나 또 반복되는 우당탕...  봄이는 약 올리듯 물건들을 다시 밀어냈다.


"아 진짜. 짜증 나려고 하네..."


나는 국어교사도 아니고 딱히 바르고 고운 말 사용을 강조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존나, 재섭서, 미친놈 등을 입에 달고 살던 시절도 있었던 무척 평범한 사람인데, 딸에게 이런 말이 나오자 욱했다. 꼰대라해도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짜증 나면 내다 버리라고 소리를 빽 질렀다. 고양이 고양이 노래를 불러서 데려왔더니 화장실 한 번 치우길 하나 물그릇 한번 바꿔주길 하나, 잠이나 자야 예쁘다 하지, 조금만 귀찮게 굴어도 짜증 나 짜증 나...  봄이가 네 물건 건드는 게 싫으면 수납장 안에 넣어두면 되잖아!  


고양이는 살아있는 생명이다. 특히 생애주기로 봤을 때 봄이는 일생 중 가장 생기발랄할 어린 고양이다. 궁금한 것이 많은 그는 항상 바쁘고 그래서 자주 피곤하다. 사방팔방 돌아다니며 내 집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은 장소만 골라 들쑤시고 다닌다. 그리고 곧장 싱크대나 식탁 위로 서슴없이 올라 달 표면을 걷는 우주인처럼 먼지 발자국을 찍는다. 사람과 눈높이를 맞추고 새로운 영역을 정복한 위풍당당함을 뽐낸다.  갈릴레이 수준으로 머리가 똑똑해 중력을 이용해 놀 줄도 안다. 재질, 크기, 내용물이 각기 다른 물건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면서 재미있어 어쩔 줄 모른다. 사람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어 한다. 그루밍도 해야 한다. 밥도 먹고 똥오줌도 싸서 모래에 묻고, 발톱도 간다. 물론, 적도 물리치고 사냥도 한다. 하루 스물네 시간 중 잠자는 시간을 뺀 대여섯 시간 안에 이 모든 일을 다 해야 하니 얼마나 바쁘겠는가. 활동시간을 따져보면 사람보다 고양이가 더 바쁘다. 고양이는 얌전하게 앉아 나를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 고양이는 건강한 생명이기 때문에 사료를 먹으면 하루에도 몇 번씩 똥과 오줌을 싼다. 똥과 오줌에서는 냄새가 난다. 고약한 냄새는 집안에 퍼진다. 잠을 자고 나면 눈곱도 끼고 귀지도 낀다. 예방접종 때문에 병원에 가면 치석이 있으니 양치질을 해주라는 잔소리도 듣는다. 재채기를 할 때마다 침과 콧물이 사방팔방 튄다. (왜 앞 발이 있으면서도 재채기를 할 때 입을 가리지 않는 거지?) 배가 고프면 새벽 세 시에도 밥을 달라 깨우고, 심심하면 노트북 위로 올라와 훼방을 놓는다. 기분이 안 좋으면 보채고 화나면 물고 마음에 안 들면 할퀸다. 돌아서면 물건을 어지르고 화분을 엎는다. 이 모든 일을 관리하는 데에 오롯이 한 사람 몫의 노동이 필요하다. 가뜩이나 바쁘고 피곤한 일상에 치여 지쳐있는 인간에게 고양이는 분명 귀찮고 성가신 존재다.


도리스 레싱이 쓴 <고양이에 대하여>를 읽었다. 책은 1919년생인 레싱이 어린 시절 아프리카의 한 시골 마을에서 고양이와 살던 시절을 회상하며 시작한다. 당시는 중성화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석 달마다 대여섯 마리의 새끼를 낳는 고양이의 개체 수를 조절하기란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자칫 방심하면 순식간에 집안 전체가 고양이로 뒤덮이곤 했다. 레싱의 어머니는 고양이 새끼가 태어나면 사용하지 않는 뒷마당 우물에 던져 버렸다. 함께 살며 저녁마다 무릎에서 골골거리던 고양이가 낳은 새끼든, 근친교배로 태어나 장애가 있는 새끼든, 어미 잃고 우는 새끼든, 고양이라면 무조건 쓰레기와 함께 우물에 던져버리는 것만이 당시 어머니가 고양이의 개체수를 조절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 일은 모두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이유로 어머니가 하셨다. 농장 일은 남자인 아버지 몫, 집안일은 여자인 어머니 몫이라는 논리다.


어머니는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이해하고 거기에 보조를 맞출 줄 아는 사람이었다. 우울한 역할이었다.

아버지도 그런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시골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현실에 반발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래서 꼭 처리해야 하는 일이 생겼을 때, 절대 물러나면 안 되는 상황에서 조치를 취하는 사람은 어머니였다. "그럼 됐잖아! 그렇지!"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버지의 역설적인 분노가 감탄스러웠다. "자연은 다 좋아. 제자리를 지키기만 한다면."아버지는 이런 말로 항복의 뜻을 표시했다.

p.27 <고양이에 대하여>


고양이가 마흔 마리쯤 된 어느 날, 레싱은 짜증을 내며 말했다.


엄마가 마음이 약해져서 새끼 고양이를 차마 물에 빠뜨려 죽이질 못해요.

이날은 집에 아버지와 레싱, 단둘이 있었다. 어머니가 일 년 가까이 집안의 조정자 겸 중재자 역할을 거부하던 시기였다. 아버지는 동물병원에서 클로로포름을 사 와 방 안에 고양이를 모두 몰아넣고 약을 뿌렸다. 수의사는 즉시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해 결국 아버지는 1차 세계대전 때 사용했던 권총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고양이 홀로코스트 사건 후 아버지는 손을 덜덜 떨며 어머니에게 "그런 일은 다시는 없어야 해."라고 말했고, 레싱은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후에야 고양이를 들일 수 있었다.



여자들, 특히 엄마들은 안다. 100년 전 레싱의 어머니와 현재 여자들의 삶은, 여러 가지 면에서 비교할 수 없게 좋아졌다지만, 그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고양이와 살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은 주변 여자들의 첫마디는 모두 같았다.


"그거 다 엄마 일이잖아요!"


맞다.  고양이에게 필요한 대부분의 노동은, 주부인 나의 몫이 되었다. 그 과정은 나조차도 인지하지 못할 만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오늘도 액세서리 통을 딸의 손에는 쉽게 닿지만 고양이의 앞발에는 닿지 않을 위치를 찾아 변경해야 했다. 누가? 내가. 이렇게 주부라는 이유로 내 시간과 노동과 에너지가 제일 많이 뺏기고 있으니까 나야말로 고양이에게 짜증 난다. 하지만 봄이의 본능은 안다. 인간의 '아이고오~ 요놈!'과 '아이씨!'의 차이를. 새끼 고양이도 눈치채는 주부의 '아이씨!'가 집안에 미치는 영향은 굳이 말 안 해도 될 것이다.  


이러한 보조 맞추기. 레싱의 말대로 '우울한 역할'이다. 그래서 또 한 번 중얼거리는 것이다,

"이거 이거... 정말 어마어마한 일이었군..." 이라고.


하지만 그 보조를, 나만 맞춰야하는 걸까. 아무리 이 집의 주부가, 고양이를 돌보는 노동을 하는 사람이, 나라고 해도.


고양이와 함께하는  시간은 대부분 똥오줌 치우고 청소하고 밥그릇 물그릇 닦고 할퀴어진 내 옷에 구멍이 뚫리고 문제집은 구겨지고 핀통은 뒤집어 엎어지고 벽지는 찢어지고 낚싯대는 던져지고 털이 날리는 데에 소모된다. 딸의 말처럼 우리 모두 짜증 나는 순간이 많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봄이는 우리 가족 모두의  책임이 되었다. 


그러니까, 아무리 짜증 난다 해도, 감정을 함부로 입 밖으로 내뱉으면 안 돼. 형제가 없던 감정은 말로 내뱉어지는 순간 실체를 갖게 기 때문이지. "봄아"라고 부를 때 배가 간질거리고 눈빛이 다정하게 변하는 것처럼 "짜증 나."라고 말하면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의 돈벌이에 이용된 저 생명이 이제 귀찮기만 한 애물단지가 되어버리잖아. 그러니까 쉿. 


새로 산 숨숨집에 커튼을 달아줬는데 다시 보니 삐뚤다. 떼어내고 다시 달았다. 그러고 보니 새 집 위치가 불편한가 좀처럼 안 들어가서 위치를 다시 잡아주었다. 캣그라스에 물을 주고 먼지 앉은 물그릇을 비워 새 물을 채워주고 창문을 앞뒤로 활짝 열고 화장실도 치웠다. 봄이는 그런 나를 캣타워 위에 앉아 가만 쳐다보고만 있다.


봄아,


불러도 내려오지 않고.


현실에서 나에게 고양이가 필요할 타이밍과 고양이에게 내가 필요할 타이밍은 (sns에서 보여지는 것만큼) 쉽게 맞지 않는다. 어쩌다 내 시간의 파동과 고양이 시간의 파동이 겹쳐 하나의 선이 될 때, 그렇게 우리가 포개어질 때, 비로소 우리가 꿈꾸던 교감이 잠시나마 가능할 뿐이다. 앞으로 우리 가족 사이에 좀 더 자주 그 행운이 찾아오면 좋겠다. 분명 운수 좋은 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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