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아는 세상의 유일한 사람인 것처럼

#somewhere

by 너무 다른 역할

<언젠가 나였던 나에게>는

여행수첩과 일기장에 남아 있는, 과거의 나에게 말을 거는 시도입니다.

지금의 내가 더 나아졌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지만...



2월 26일 (일)


더 알고 싶지 않아.

조금 남겨둬야지. 여지를 줘야지.

세상의 비밀스러움을 낭만적으로 방치하는 일.

조금이라도 개의해서 비밀스러움을 만들어내는 일.


나를 아는 세상의 유일한 사람인 것처럼, 그는 가만히 나를 쳐다봤다.

웃었다. 안았다.




일요일의 일기를 아마 너는 월요일 사무실에서 몰래 썼을 거야.

어제의 비밀스러움을 상기하면서, 가볍게 다리를 구르면서. 하지만 말이야.


꽤 불친절한 연애였어. 돌이켜보면.

두 사람 모두, 감정에의 의존이 큰 20대 중반이었고, 지금 니가 만나는 그 사람은 특히나 감정에 지배당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약속시간 1시간 전에, '오늘은 기분이 별로라 다음에 만나요'라는 문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보낼 정도로 말이야. 하지만 누굴 좋아한다는 일은 늘 고단하기에, 넌 이런 불친절함 정도는 쉽게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실제로도 꽤 잘 참았고.


이 날의 일기를 다시 들여다보니, 넌 그녀의 불친절함을 낭만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처럼 보여.

연인 사이에 의무방어전처럼 공유하곤 하는 서로에 대한 시시콜콜한 정보가 꽤 부족한 사이였어. (너도 잘 알고 있겠지만) 그녀는 매우 현재 지향적이고 자기 지향적인 사람이니까. 지금 자기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 표현할 때 외에는 그다지 말이 많지 않았어. 잘 웃긴 하지만 그건 '별다른 말을 하고 싶지 않아요'라는 표현일 뿐이지.



둘만의 시간을 보내는 순간에는 그녀의 현재 지향적, 자기 지향적인 성향이 매우 좋을 거야. 그녀는, 너를 아는 유일한 사람인 것처럼 너의 눈을 바라보고, 너의 몸을 쓰다듬으니까. 너라는 존재가 그녀의 현재로 인해 확인되곤 하니까.


그래서 너는 그 공백을
<비밀>이나 <여지>로 치환시켜버린 거야.

그러면 그건 빈 공간이 아니라, 둘 만의 공간으로 바뀌어버리니까. 영리한 시도야. 어쩌면 그게 사랑을 지속할 유일한 방법일지도 몰라. 돌 만의 공간을 헤자처럼 둘 사이에 둘러버리는 거지.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게.


그녀 이후의 연애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어. 모두 친절한 사람들이었거든. 자기가 가진 모든 걸 공유하고 싶어 했어. 이제껏 겪어온 삶을 통째로 말하고 싶어 했고, 앞으로 같이 맞이할 시간들을 부풀려 상상했지. 현재를 뜨겁게 보내는 건 당연했고 말이야.


그녀와 했던 연애 방식과 그 외 방식의 차이를 얘기하고자 하는 건 아니었어. 둘 모두 너(그리고 나)에겐 충분했어. 옆에 있는 누군가로 인해 너(그리고 나)의 삶은 질적으로 충만했어. 그 연인들과 헤어졌다고 해서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내가 저 날의 일기를 보면서 생각하고 있는 건, 요즘 내가 하는 고민이야.


과연 내가 앞으로,
그녀를 아는 세상의 유일한 사람처럼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많이 두려워.


어느 순간, 그러니까 30대 중반을 훌쩍 넘겨버리는 어느 지점부터, 연애의 진폭이 작아졌어.

사귀고 있는 누군가로 인한 나의 감정과 행동의 기복이 좁아졌다는 얘기야. 분명 나는 어떤 사람과 좋아서 만나고 같이 밤을 보냄에도 불구하고, 안달을 하거나 초조해하지는 않아. 말하자면, 호감 바로 윗단계의 수준에서 감정이 정체되는 느낌이랄까. 이제껏 겪었던 충만한 연애 감정, 그러니까 상대로 인해 내 온몸과 마음이 이리저리 휘둘리는 느낌이 어느 순간부터 없어졌어.


출구를 미리 생각해 놓은 대화,

각자의 일상에 지장을 주지 않는 한에서의 섹스,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오가는 배려와 조정.


왠지 뭔가를 잃어버린 거 같아서 속상해. 다시 그런 감정을 되살리기 위해 애를 써볼까 생각해봤는데, 그건 노력의 영역은 아니니까. 어쩌면 이게 <성숙>으로 설명될 일일지도 모르는데, 뭐랄까 그런 설명을 스스로에게 할 의욕은 아직 생기지 않았어.


과연 애정의 진폭은 어느 수준이 적정한 것일까.

요즘은 이런 질문이 계속 반복되고 있어. 답은 아직 보이지 않고.

혼란스러움으로 말을 끝내고 싶진 않은데 오늘은 그냥 이렇게 끝낼 수밖에 없네.

조만간 성숙했음을 인정할 수 있을 때, 이 이야기를 다시 해볼게.


한없이 비밀스럽고 더없이 낭만적인 그녀와 이야기할 수 있는 니가 부럽네.



P.S.

너무 비밀스럽게만 그녀를 대하진 말아.

그녀는 너의 배려가 서운할 수도 있거든.

(나중에 그렇게 말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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