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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던 시간이 쌓여 전구가 죽는다

by 너무 다른 역할

1.

오르골의 틈으로 들어가 죽은 독수리의 부리에선

삭은 초유 냄새가 났다


연애를 文과 明이라 칭하던 여자의 혀 아래엔

붉은 털이 나있었다


어쩌면, 과 그래서, 가 없는 모국어를 쓰는 이의 시간엔

도돌이표가 보이지 않았다



2.

마음을 준 사람과 눈을 마주친 횟수만큼 바느질을 한다는 이와

대화를 한 적이 있다


그이의 마지막 연인은 127벌의 옷을 선물 받은 후

개기일식을 기다려 사라졌다고 했다


실금 안으로 스며든 찻잎의 문신이 진해지는 시간이면

손에 쥐고 있던 바람을 놓아주어야 한다고


실 없는 바늘로

자신의 입술에 수를 놓으며 말했다


지루하다,를 두렵다, 로 바꿔 말하다가

두 단어의 생김새를 영영 잊어버린 이가 있었다


낮이 밤을 잡아먹는 날이면

숫자를 집에 두고 온 물리학자 같은 표정을 지어야 한다고 말하며


지루하기 그지없는 그림을

쉴 새 없이 그려댔다



3.

발목을 지운 새들이 쉬어간다는 음수대에서

죽은 전구를 하나씩 꺼내 씻는다


진공 밖으로, 쌓였던 빛들이 진액처럼 흘러나올 때


을 찍은 붓으로

유리 안쪽에 이목구비 없는 초상화들이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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