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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Oct 23. 2019

밀매한 감성은 지금까지로도 충분했어


여행 중, 스스로의 평범한 반응에 놀랄 때가 있다. 눈에 담기는 모든 것이 처음인 풍경 속에서 자신의 기분을 설명할 말을 찾지 못해서. 낭만을 가장할 수도, 깨달음을 연기할 수도 없는 순간, 내가 쌓아왔던 감성들은 감상의 형태로 내 입밖에 나오지 못한다. 


휘청일 때마다, 심심할 때마다, 외로울 때마다 하나씩 감성을 사들였다. 내면을 체계적으로 주입받은 정규 교육이 끝나고 내가 들인 감성은, 주로 몰래 들여온 것들이다. 


호주머니에 있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감성들은 뻔했다. 모두가 알고 있는 것들에게선 방부제 냄새가 심하게 났다. 그런 것들로 속을 채우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종종 돈을 모아 희소성이 있는 감성을 사기도 했지만 그것 역시 수월하진 않았다. 시장에 나와 있는 것들은 몇 개 되지 않았고 그조차 중개상인의 취향이 싸구려 향수처럼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밀매(密買).


몰래 들여온 것들은 늘 물기가 가득했다. 덕분에 내 안 어디에 밀어 넣어도 제자리인 양 자리를 잡았다. 남의 손을 덜 탄 것들에게선 특유의 신내가 났다. 그 냄새를 맡으면 온 몸의 피부가 팽팽해지는 기분이었다. 설명서는커녕, 제대로 된 경험담도 들을 수 없어서 혼자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했지만, 구석구석 눈으로 더듬으며 받아들인 감성은 내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신선했던 감성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내 안에서 낡아갔다. 몇 개의 감성들은 취향이라는 이름으로 희미하게 남긴 했지만, 대개는 기약 없이 산패했다. 어설프게 끼워 맞춘 이음새는 덜컥거렸고 표면에는 녹물이 흘렀다. 여행 중 나를 둘러싼 새로움 속에서도 낡은 감성들은 살아나지 못했다. 


남의 신발을 신고 순례를 할 수는 없으니, 결국 밀매한 것들에게 기대는 건 여기까지인 걸로. 앞으로도 타인의 감성을 몰래 들여다보긴 하겠지만, 그걸 쌓아두고 안심하진 않을 거 같다. 그 공백을 채우는 건 아마 보잘것없는 나의 단어 몇 개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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