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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Nov 05. 2019

무너진 터를 두고 새 탑을 올린다

불면의 꿈을 꿨다. 


여행 도중, '그녀'를 잠시 숙소에 두고 혼자 음식을 사 가지고 돌아오는데, 도무지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차는 컴컴한 산속 비포장 도로에서 한참을 오도 가도 못했다. 겨우 방향을 잡아 찾아간 숙소에 그녀는 없었다. 돌아갈 비행기 시간이 거의 다 됐기에 아마 먼저 공항으로 갔겠거니 하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런데, 싸야 할 짐이 점점 늘어났다. 침낭과 담요가 몇 겹이나 되었고 옷 무더기가 여기저기에 있었다. 혼자 앉아 사 가지고 온 음식을 먹다가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니 머리맡에 그녀가 두고 간 액자가 있었다. 액자는 따뜻했다. 다시 짐을 싸기 시작했다. 다행히 배낭 안에 다 들어갔다.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가는 길에, 숙소 옷장에 두고 온 짐들이 생각났다. 

공항의 대합실에서 다른 친구들을 만났다.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내 배낭 속에서 책들을 꺼내 건넸다. 술에 취해 잠시 졸다가 깨니 친구들이 공항 밖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몸을 일으켜 그들을 잡으려다가 문득 옆의 쓰레기통을 봤다. 내가 준 책들 중 한 권을 뺀 나머지가 처박혀있었다. 한 권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친구들을 따라갔지만, 헤치고 갈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간격은 멀어지고, 결국 비행기가 뜨는 걸 멀리서 봐야 했다. 


그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잠은 거기서 깼다. 




새벽 5시 30분, 결국 일어나 거실에 앉았다. 


이 현실에 그녀는 당연히 없다. 싸지 못한 짐이나 타지 못한 비행기도 없다. 약간의 두통과 약간의 한기가 있을 뿐이다. 어떤 종류의 욕망과 좌절이 저런 꿈을 지어냈을까. 명쾌한 답을 떠올리지 못하는 사이 꿈이 빠르게 증발한다. 등장인물들이 하나씩 지워지고 풍경들이 암전 된다. 하루가 시작돼, 실제 손으로 만져지는 현실로 들어가면, 하룻밤 동안 혼란스러웠던 나만의 극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꿈을 만들어낸 것들은 여전히 내 안에 있다는 걸 안다. 몸이 움직이는 동안 내 안에 가라앉아 있다가, 내가 명쾌하게 꺼내지 못하는 단어들로 기초를 닦아 다시 하나의 극장을 만들고 그 꿈속으로 나를 납치할 것이다. 결국 매일 밤 나는 늘 같은 코스를 도는 가이드처럼, 늘 짓는 표정을 띤 채 불면을 맞이할 것이다. 



여행 도중, 새 탑이 올라가는 광경을 본 적이 있다. 

지진으로 폐허가 된, 수천 년 전의 성당 터를 둘러보는 중이었다. 기독교인도 아니고, 그 시대의 건축 양식에 대한 관심도 없었기에, 돌과 안내표지판이 전부인 곳을 천천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바람이 잘 부는 가장자리 쪽으로 갔을 때 옆 마을에서 탑을 세우고 있는 걸 봤다. 내가 서 있는 폐허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탑을 올리는 사람들의 바람은 오래전 성당을 짓던 사람들과 같았을 것이다. 자신들이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이나, 보고도 믿지 못하는 것들, 혹은 믿어도 지속되지 못하는 것들을, 누군가가 대신 봐주고, 믿어주고, 유지시켜줬으면 하는 바람. 고단하고 무료한 하루를 매일 반복하면서 잊게 되는, '나'라는 이유를 누군가가 알아봐 줬으면 하는 바람. 



하지만, 지금 사람들은 무너진 터는 무너진 대로 둔 채, 새로운 자리에 탑을 올리고 있었다. 


같은 자리에 새로운 탑이 올랐다면 우리의 시야는 탑의 아래에서 시작해 짧게 끝났을 테지만, 다른 자리를 택한 덕에 탑의 전체를 조망할 수 있었다. 기존의 자리가 깨끗이 정리됐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자리에 올라갈 탑의 기초가 더 중요할 것이다. 그렇게 세운 새로운 탑에서 본 하늘은 다른 채도를 가질 것이었고, 당연히 새로운 기도가 울려 퍼질 것이다.   





어쩌면, 요즘 내가 겪는 불면의 이유는 명명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면 굳이 수고로운 되풀이를 하지 않고, 방치할 건 방치해야 하나 싶다. 무책임하게 뒤돌아서서 다른 자리에 옮기면 그뿐이지 않을까. 꺾인 나의 욕망은 사라지진 않고 내 안에 폐허처럼 남아있겠지만, 적어도 다른 자리에선 그 전체 모습을 바라볼 순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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