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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Apr 05. 2020

출근길의 꽃, 퇴근길의 봄

#도보 출퇴근 : 대학로 종로 을지로



집을 나선다.

현관문을 닫는 순간 시계는 보지 않기로 한다.

늦어야 10분 지각, 급하면 전화가 오겠지만 요즘 그럴 일은 거의 없다.

대문 앞에 서서, 9와 숫자들, 을 들을까, 가을방학, 을 들을까 잠시 고민하다 한쪽을 택한다.

나머지는 퇴근길에 틀면 된다.


이어폰을 꼽고 오른쪽에 멘 카메라 스트랩을 잡는다.

대학로에서 충무로까지, 50분간의 출근길 꽃구경이 시작된다.



옆의, 옆의, 옆의, 옆의 집은 봄 내내 환하다.

저 집에 사는 사람들의 얼굴은 아직 본 적이 없다.

이 집 마당엔 목련과 벚꽃과 라일락이 있다.

라일락은 아직 숨을 고르고 있지만, 목련과 벚꽃은 활짝이다.


다행히(?) 마당이 좁아서 꽃나무들의 가지는 골목으로 한참 나와있다.

의도하지 않은, 이타성을 지닌 집이다.

하지만 담이 낮진 않아서, 벚꽃을 눈 앞으로 당길 수는 없다.

라일락이 흐드러질 때를 기다려야겠다.



몇 년 전에 생긴 대학로 뮤지컬 센터의 뒷벽엔 큰 꽃나무가 몇 그루 있다.


정작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앞쪽엔 나무 한 그루가 없는데도.

그래서 출근할 때는 뒷벽 쪽으로 방향을 튼다.

나무들의 아래엔 사람들이 길고양이들을 위해 가져다 놓은 물그릇, 사료 그릇이 여러 개다.

고양이들은 밥을 먹고, 사람들은 눈으로 꽃을 먹는 봄이다.



주차장 벽 위에는 개나리가, 찻집의 벽 아래엔 팬지가 만개했다.


만개(滿開)라는 말에는 뿌듯함이 숨어 있다.

'봐봐. 봄을 알아채고 다 펴버렸어'라고 자랑하는 듯.



충신동으로 방향을 잡는다. 대로는 피하고 뒷길로 간다.

택배 집하소가 모여있는 곳에 자목련 한그루가 있다.

봄마다 느끼는 거지만, 자목련의 자주색엔 기품이 있다.

하얀색과 자주색은 다투지 않고 서로 스며들어 있다.


일부러 땅에 떨어진 꽃잎들을 먼저 보고 나서, 나무를 올려다본다.

그러면, 져버린 꽃이 초라해 보이지 않는다.

다만, 봄을 먼저 맞았을 뿐이다.



청계천의 잎들엔 벌써 광택이 흐른다.

사람들이 부지런히 걷는 사이, 봄은 인도를 침범하고 있다.



종로, 을지로 골목엔 꽃나무가 없다.


대신, 수십 년 꽃 같은 청춘을 바치며 만들어온 점포들이 있다.   

가지런한 물건들의 선(線)이 꽃에 다름 아니다.

사람들도 꽃을 피워낼 수 있다.

굳이 봄이라서 그런 건 아닐 게다.


인공(人工)을 지나치며 마음을 놓는다.



해가 적은 골목의 목련엔 아직 봉우리가 남아있다.

목련나무의 가지 위에 차례로 봄이 오고, 같은 차례로 봄이 갈 것이다.


봉우리가 남아있는 한, 아직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난, 남은 길을 서둘러 사무실로 출근한다.




퇴근을 서둘렀다. 이유는 없었다.

봄이라고 퇴근이 빨라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서둘렀다.


늘 그렇듯,

출근할 때 걸린 시간보다는 오래 걸릴 것이다.

다시 이어폰을 꼽고 카메라를 꺼낸다.



세운상가 보행교 쪽으로 퇴근길을 잡는다.

가게마다 애써 맞춰놓은 색을 즐긴다.

원색이 가미된 풍경은, 요란하지 않다.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다. 역시 요란하지 않다.



때 맞춰 석양이 지고, 때 맞춰 전구에 불이 들어온다.

사람이 할 일이라고는 그 아래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것뿐이다.

사무실에서 들었던 시끄러운 문장들이 어느새 머리 밖으로 나가버린 느낌이다.


음악에 집중하고, 풍경에 집중하고, 걸음에 집중한다.



잠시, 노란 세상이 지속된다.

아직 잎을 내놓지 못한 가로수에도 공평하게.



누군가 초록을 옮긴다.

초록이 난 자리에도 여전히 초록이 남아있을 거라고 상상해본다.

봄이니까, 뭐, 괜찮다.



다시, 대학로로 들어선다.



방송통신대학교 뒷길의 벚꽃나무는, 벌써 초록잎을 내놓고 있다.

봄을 선도하는 꽃나무,라고 나 혼자 명명한다.

'지식의 전당'답군, 이라고 나 혼자 중얼거린다.


이어폰을 끼고 있어서, 아마 혼잣말이 꽤 컸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주위에 사람은 없었다.



담쟁이넝쿨 앞으로 나무가 꽃을 잔뜩 피웠다.

도로에 인접한 좁다란 화단에, 길고양이 집을 만들고 보호용 나무판자까지 놓은 집이다.


봄이 지나면 다시 넝쿨의 초록이 전면에 드러날 것이다.

꽃이 지는 건 아쉽겠지만, 초록이 진해지는 걸 굳이 마다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집 앞 골목,

세워둔 트럭에 봄이 실렸다.


이 봄날에만 볼 수 있는

많지도 않은, 한 송이의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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