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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Apr 11. 2020

평균이 없는, 아침 골목

#동숭동에서 익선동까지

그렇게 말한 후지사와 씨가 소리를 내서 웃었다. 어렸을 때부터 쭉 바뀌지 않고 그 사람한테 있었던 무엇인가가 떠오르는, 그런 웃음이었다.


-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중에서, 마쓰이에 마사시





밤의 골목엔 평균이 있다.


움직이는 빛과 같은 자리를 밝히는 빛,

간헐적 소음과 상시적 웅성거림,

취기를 받아들이는 취객과 취기를 구경하는 동행,

풀린 욕망과 불가해한 도덕......


이렇게 대립되는 것들이, 어둠 속에서 중간값으로 수렴한다.


어둠 속 골목의 평균은,

밤이 윤전(轉)하며 나오는 동작음(作音)이다.

골목의 풍경보다는 어둠이 전면에 나선다.


스스로의 최저값과 최고값 사이에서 방황하는 우리는,

어둠을 아지트 삼아 답을 찾거나 잊을 수 있다.


동숭동 / 빛은 풍경의 뒷자리로 당도한다


아침의 골목은 다르다.

골목은 빛에게 주인공의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동숭동 / 빛은 수많은 면(面)에 시차를 두고 내린다


이는 빛이 일정한 밀도를 가지지 않아서 가능하다.

빛은 어둠처럼 전면적이고 일시적으로 내리지 못한다.

특히, 이 도시의 골목에는 더더욱.


그 불균등함 속에서, 골목은 주인공이 되어 자신을 드러낸다.


원남동 / 세월을 무시하고, 풍경은 중첩된다


모든 골목은 각자(自)이다.


'어렸을 때부터 쭉 바뀌지 않고 그 사람한테 있었던 무엇인가가 떠오르는, 그런 웃음'처럼,

각각의 골목은, 우리가 밟기 전부터 있던 형태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원남동


그런 이유로,

아침의 골목, 풍경엔 평균이 없다.


우리가 걸으며 느끼는 감상까지 포함하여, 아침 골목에 있는 모든 것들은,

불분명한 평균으로 수렴하지 않고, 그 자체로 드러나있다.  

빌딩, 집, 공터, 가게, 전봇대, 벤치, 담, 나무, 전단지, 표지판, 출근하는 사람들, 자전거 같은 것들은

제각각의 형태로 눈에 들어오고 제각각의 속도로 빠져나간다.


권농동 / 표지판의 뒤는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아침의 골목을 아지트로 삼을 수 있다.


그건 밤의 골목에서와는 다른 방식이다.

밤에 우리는 어둠 속에 숨거나,

그 안으로 우리의 실타래를 몰래 풀어놓는다.


권농동 / 낡은 것들로 새 것이 마무리되고 있다


그러나 아침의 골목에선 그러지 않아도 된다.

머릿속을 채웠던 복잡한 질문들 끝에, 물음표가 보이지 않는다.

명암이 자유로운 아침의 골목을 걸으며,


우리는 마침표로 마무리된 문장들을 되뇌기만 하면 된다.


권농동 / 빛이 있는 곳에서 꽃은 여전하다


얽힌 것들을 부러 풀어헤쳐 하나의 선으로 만들 필요도 없다.

맺힌 부분은, 내가 짖지 않았어도, 매듭으로 그냥 놔두면 된다.

생각이라는 실, 감정이라는 선은 매듭이 졌다고 끊기진 않는다.


잠시 멈추고 다시 이어질 뿐이다.


운니동 / 꽃이 펴야 꽃이 진다


뭔가를 놓쳤다고 해서 아쉬워할 필요도 없다.

흘러간 것보다, 다시 눈에 들어올 것들이 넘치는 시간이다.


놓친 것들은, 놓칠 만한 이유가 있어서,라고 생각하면 된다.


익선동 / 축복 같은 건 좀 난무해도 될 텐데


아침 골목에선 무엇도 무엇을, 누구도 누구를 신경 쓰지 않는다.

각자가 각자의 빛을 안고 적당히 반사한다.

그건 아침에만 누릴 수 있는 축복이다.


종일 그럴 수 있지만 시간에 늘 치이니까. 아침에라도.


익선동 / 아침의 걸음은 밤의 흔적만큼 고스란하다


풍경을 꾹꾹 밟으며 걸어간다.


최대한 조심스럽지 않게.

서두를 이유를 굳이 생각해내지 않으면서.

손톱으로 피부에 금세 없어질 자국을 내듯이.


익선동 / 말이 치워진 상에, 저녁이면 다시 말이 채워질 것이다


절그럭, 대며 쇠 자물쇠가 풀리듯,

아침에서 오전으로 넘어갈 때도, 하나의 신호가 들릴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미동에 반응하는 절박한 감수성을 다시 장착한 채, 하루를 시작한다.


하지만, 아침의 골목에서처럼 가끔 멈추면 된다.

통과해 온 골목의 풍경들을 심드렁하게 쳐다보듯이,

우리를 셈하는 것들을 무심하게 흘리면서.


익선동 / 커튼은 늘 걷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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