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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Apr 25. 2020

다 펴야 이쁠 거인디

#남원 진기리 느티나무

-미안하다. 심한 말 해서.

필용이 사과했다

-선배, 사과 같은 거 하지 말고 그냥 이런 나무 같은 거나 봐요

양희가 돌아서서 동네 어귀의 나무를 가리켰다. 거대한 느티나무였다. 수피가 벗겨지고 벗겨져 저렇게 한없이 벗겨져도 더 벗겨질 수피가 있다는 게 새삼스러운 느티나무였다.

-언제 봐도 나무 앞에서는 부끄럽지 않으니까, 비웃질 않으니까 나무나 보라고요.


-김금희 소설 '너무 한낮의 연애' 중 (문학동네, 2016년)





신기마을이라는 돌 간판이 큼지막하다.


시골마을 안으로 차를 몰고 들어가는 건 왠지 실례처럼 느껴마을 입구에 차를 세운다.

경운기 얌전하게 주차돼 있는  아래, 파종을 기다리는 흙이 표면부터 마르고 있다.

볕이 가득하지만 찬 바람이 불어 윗옷을 하나 겹쳐 입는다.

출장에서 복귀하는 길, '전라북도 천연기념물' 목록을 검색한 후 그중에서 가까운 데를 찍고 온 곳이다.

아무런 정보가 없어서 머리도 가볍고 걸음도 가볍다.



마을로 들어선다. 첫 번째 집 대문 안에서 할머니들의 대화가 들려온다. 혹시 외지인이라 놀랄까 싶어 마스크를 고쳐 쓰고 천천히 걷는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시야에 들어오자 할머님 두 분이 말을 멈추고 빤히 쳐다본다. 옆에 서 있던 할아버지도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다.


-저기, 나무 보러 왔어요

-아, 예


나무, 라는 단어 하나에 세 분의 경계가 풀어진다. 금세 눈웃음이 오간다.

긴 세월 편안함을 준 나무라는 증거다. 이곳에 사는 마을 사람에게도, 오가다 들른 나 같은 외지인에게도.



-다 펴야 이쁠 거인디.


어느새 동네 골목길로 나선 할아버지가 한 마디 던진다. 뒷짐을 진 그의 시선은 내가 아니라 나무를 향해 있다. 그를 따라 눈을 돌리니 봄볕을 맡고 있는 나무가 한눈에 들어온다.


-언제 다 펴요?

-뭐 이제 금방이지.


할아버지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나를 앞질러간다. 고맙다는 말을 그의 등 뒤에 흘리고 나무 쪽으로 걸어간다.



느티나무다.



이유 없이 반갑다. 느티나무 역시, 누가 와도 반겨줄 듯한 품을 보이고 있다.

이곳의 일들을 가지마다 안은 채, 수백 년을 천천히 살아온 듯.

 

사람들은 나무를 위해 사당을 지어 놓았지만, 나무로 가는 길을 막아놓지 않았다.

낮게 쌓은 반원형의 축대가 전부다. 몇 개의 계단을 오르니 나무가 시야 한가득다.

나무의 그림자와 뿌리가 같은 땅 위에 드러나 있다.



직선을 닮은 느티나무의 곡선이 거침없다.

가지들은 자신만의 방향으로 뻗어 있다. 잎이 거의 나지 않은 상태지만 생명력이 넘친다.

가지는 나무를 떠날 수 없지만, 나무가지로 해 자신의 방향을 하나씩 늘려간다.

 


나무는 마을보다 높은 고도를 갖는다.

나무의 땅보다 낮은 곳에 사람의 길과 집이 있다.

사람들이 집을 나무보다 낮게 지은 건, 나무를 경외시해서가 아닐 것이다.

그건, 사람들이 나무에게 들키기를 원해서일 것이다.

 

누군가는 기뻐 뛰어다니면서 나무를 올려다봤을 것이고,

누군가는 취기로도 감추지 못한 슬픔을 안고 나무 아래 서 있었을 것이다.

혼자 감당하고 싶지 않은 자신을 나무가 알아주길 바라면서......

나무는 화답하듯, 마을을 향해 가지를 낮게 뻗었다.



구름이 잘 보이는 곳에 새가 둥지가 틀었다.  

처음에는 두 개인 줄 알았는데 나무를 빙 돌며 보니 둥지는 세 개다.

어느 새일까 궁금해져 한참을 쳐다봤지만 둥지의 주인은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 봄 구경 갔을 것이다.



잔가지는 그림자를 갖지 않는다.


새삼스럽다고 생각하다가, 이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땅에 그림자를 새긴 굵은 가지는, 그림자 면적만큼 고스란히 볕과 바람을 맞을 것이다. 하지만, 볕에 빼앗길 수분과 바람에 성겨질 거죽을 견딜 만큼, 가지는 단단할 것이다. 그림자를 가진 몇 안 되는 가지가 나무를 지탱하고 있다.

 


그림자 하나 책임지지 않는 가지들에서 잎이 터져 나오고 있다. 잎은 먼 가지에서부터 오른다. 봄이 가기 전, 여린 녹색에서 짙은 녹음으로 나무는 색을 갖춰 입을 것이다.

어느 시절에 그랬듯, 여느 해에 그랬듯.


누군가의 소식에 들뜬 듯, 발아래의 흙이 부드럽다.



뒤쪽 축대에 이끼가 잔뜩이다.

이끼는 풀의 땅을 넘어서지 못도 개의치 않는다.

그곳에 걸터앉아, 느티나무에게서 빌린 사어(語)를 읽고 싶어 진다.

 

그런 낮이다.

그런 봄날이다.



조심스럽게 땅을 밟으며 돌아 나오는데, 발아래 뭔가 눈에 띈다. 느티나무 잎이다. 땅 위로 솟은 뿌리에서 가지가 나고, 그 가지에서 잎이 났다.


한참 쪼그려 앉아, 새로 난 잎을 바라본다. 헌 기분이 사라지고 새 기분이 들어차는 듯하다.

봄은 이미 이곳에 다 폈다. 굳이 찾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계속 뒤돌아보게 된다, 나무에서 멀어질수록. 사람이 만든 것들이 풍경 안으로 하나씩 들어온다.

하지만, 시야는 훼손되지 않고 풍성해진다.

나무만의 풍경도 아름답지만, 나무와 사람이 같이 만들어낸 풍경도 포근하다.


파 밭 사이를 통과한 바람이 느티나무 쪽으로 올라간다.

둥지를 남긴 새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는다. 봄 구경이 남았지 싶다.



마을 입구 버스 정류장 옆, 인공의 직선들 사이 나무 한 그루가 다소곳하다.


하루에 여남은 번 오가는 버스를 지켜보며,

그런 하루가 쌓여 계절이 되는 걸 묵묵히 견디며,

겨우 몇 마디의 세월을 감당하던 우리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아마 저 나무는 이곳의 기억을 새기고 있을 것이다.



*신기마을의  느티나무는 천연기념물 제281호다.

설명에 따르면 조선 세조 때 심었다니 (정확하진 않겠지만) 세조 즉위 5년 뒤인 1460년부터 치면

이곳에서 560년이 된 셈이다. 설명에 나온 대로 아름드리나무를 가져왔다면 수령은 훨씬 넘을 것이다.


*내비게이션에는 <남원보절면의느티나무>라고 나온다. (T맵)

주소는, 전북 남원시 보절면 진기리 495이다. 이  주소로 지를 부치면 누가 읽을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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