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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Apr 26. 2020

아침나절, 화엄사

#지리산 화엄사 산책


이른 아침이다.

주차장 오른쪽으로 나 있는 계단을 오르니 바로 기념품을 파는 건물이 나타난다. 건물의 앞으로 계곡이 있고 돌다리가 놓여있다. 숲에 햇살이 가득이다. 선후(先後)를 알 수 없는 녹색이 빛난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물소리와 새소리는 가깝다.



부처님 오신 날을 기념하는 연등()을 따라 문을 지난다.

등은 갖가지 색을 지니지만, 등의 그림자는 하나의 색이다.

 

아침부터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생각을 떠올린다.

며칠이 지나면 앞섰던 다른 고민들과 같은 색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돌비석의 머리에 이끼가 켜켜이다.

매끈한 표면의 비석과 다르게, 갓은 일부러 이끼를 머금을 만한 재질을 선정한 듯하다.

세월을 받아들이는 속도를 주변과 맞추기 위한 의도일까. 덕분에, 나무와 불당 사이에서 어색하지 않다.



사천왕을 모신 금강문을 지나 계단을 오른다. 보제루라는 누각이 나온다. 법요식 스님과 신도들이 집회를 갖는 공간이라는 설명을 읽는다. 그 누각의 오른쪽 길이 대웅전으로 향하는 길이다. 하지만 급하지 않기에 천천히 구경하기로 한다. 왼편으로 가본다. 두 개 건물의 처마 사이로 각황전이 보인다. 주변의 것들로 시야가 막혔다기보다는 아늑한 느낌이 든다. 단청, 나무, 기와, 현판, 하늘...... 수많은 색이 한 곳에 있지만 어지럽지 않다. 한참을 서서 화엄사의 봄 색을 구경한다. 걸음을 돌려 오른쪽 길로 가려다, 다시 돌아가서 또 본다.


각황전을 이 각도에서 먼저 본 건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각을 돌자 눈이 시원하다. 거슬리는 게 없는 풍경이다. 여전히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그럴 수 있겠지만, 사람이 있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먼 풍경과 가까이 있는 풍경이 다투지 않고, 자연이 만든 것과 사람이 만든 것들이 내외하지 않는다. 그림자마저 제자리를 알아서 찾는 듯하다. 탑의 높이와 배치, 불당의 방향과 색 등에 관한 설명이 곁들여지면 훨씬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없어도 만족스럽다.


누군가 내 일상의 모든 걸 한 공간에 탈탈 털어놓고 저런 식으로 정리해줬으면 좋겠다.

보탤 것도 덜어낼 것도 없는 그런 상태로.



원경에선 색이 반복되고, 근경에선 선이 반복된다.

멀리 숲의 나무와 눈 앞의 불당 모두 위로 솟으려 한다.

나무의 법이 하늘에 있는 것처럼, 인간의 법도 하늘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까.



<동오층석탑>이라는 이름을 표지판에서 본다. 대웅전의 동쪽에 있는 5층 석탑. 편의주의적 이름이지만 큰 불만은 없다. 나한테 명명의 권한을 줬어도 그런 식으로 결론내렸을 것이다. 하나의 방향을 잡아 구체적으로 이름을 붙였다가는 다른 방향의 상상들이 누락될 수 있을 테니까. 차라리 누구나 만족할 만큼의 이름을 붙여주는 게, 먼 과거의 것들을 대하는 예의가 아닐까.


탑 너머, 누군가의 기원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쇠기둥 대신 나무기둥을 택한 마음이 고맙다.



각황전에 오른다. 계단의 경사가 완만하지 않아, 각황전이 성큼성큼 눈으로 다가온다. 계단을 오른 후 건물을 등지고 선다. 오른쪽으로 아까 지나온 보제루가 보이고 눈 앞으로는 서오층석탑과 동오층석탑이 차례로 보인다. 석탑 뒤로 (아마도) 종무를 담당하는 건물이 보이고 그 뒤로 지리산이 펼쳐진다.


숲이 하늘 아래에서 기분 좋게 몸을 푼다. 숲 덕분에 빛이 넘실댄다. 나무들이 이룬 마천루의 곡선은 부드럽다. 여린 녹색의 숲을 고스란히 주머니에 넣어가고 싶어 진다.



스님이 비질을 한다. 깨끗한 곳이 깨끗해진다.



<각황전 앞 석등>을 본다. 달리 볼 게 없는 게 아니라, 볼 수밖에 없다. 보고 싶게 생겼다. 표지판을 읽는다. 국보 12호,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었다고 한다. 높이 6.4m로 한국에 현존하는 석등 중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어마어마한 설명이다. 눈을 들어 다시 석등을 본다. 크게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여전히 '그냥' 보고 싶게 생겼다.


실제로 불을 품은 지 오래됐을 것이다. 불당 앞을 밝히는 일을 다른 '실용적인' 것들에게 넘겨줬을 것이다. 석등은 오래됐다는 이유로 은유가 돼 버렸다. 문득 불을 밝힌 석등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대웅전 뒤로 올라간다. <구층암> 가는 길이 나온다. 대나무가 흔들리는 소리에 끌려 길로 들어선다. 길 쪽으로 양 옆의 대나무들이 기울어 있다. 숲 안으로 길을 감추려는 듯. 이 아침에, 혼자서 감춰진 길을 걷는 호사를 누린다.


걷다, 멈추다, 를 반복한다.



멈추면 주위에 소리가 가득이다. 도로 소음이 멀리서 들리길래 공사 중인가 했는데 자세히 들으니 계곡의 물소리다. 여러 종의 새가, 각자의 소리를 낸다. 대나무는 그 모든 소리를 한데 합쳐 전해준다. 걸을 때는 돌을 밟는 내 발자국 소리가 섞인다. 이 또한 나무 사이로 스민다. 좋은 기분이다. 흙길을 굳이 덮지 않은 친절이 고마울 따름이다.



대나무 너머의 바람은 나에게 닿지 앉는다. 이 숲에서 바람은 소리와 흔들리는 잎의 형태로만 존재한다. 바람이 불면 먼 곳의 나무에서 가까운 나무로 서서히 사각대는 소리가 전해진다. 나무는 위에서 먼저 흔들리고 전체가 흔들린다. 바람은 혼자 소리를 내지 못한다.



숲을 벗어나자 구층암이 나온다. 마당엔 차가 여러 대다. 승방의 마루에 제물(物)이 담겼을 박스에 여러 개다. 방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커다란 동백나무가 사람들의 목소리 쪽으로 몸을 내밀고 있다.


단지 대나무 숲을 지났을 뿐인데 다른 세계에 온 듯한 기분이 든다.



벽면에 주소가 쓰여 있는 암자를 돌아가니 아늑한 마당이 나온다. 한쪽 임시 건물에선 차를 마시는 일군의 사람들이 두런거리고 있다. 스님들의 거처인 요사채에 신발이 어지럽다. 마루에는 운동기구 등 각종 생활도구가 나와있다. 이곳은 '사는 곳'이다. 스님 한 분이 문을 열고 나와 오른편의 법당으로 향한다. 갈색 얼룩을 가진 작은 개가 촐랑거리며 따라간다. 스님은 법당 안으로 들어가고 개는 몸을 말고 눕는다.



방금 돌아온 구층암의 뒤편을 보니 기둥이 새삼스럽다. 설명을 보니 요사채에 통째로 쓴 모과나무가 유명하다고 했는데, 이 두 기둥도 마찬가지이지 싶다. 분명 누군가는 경건함을 이유로 반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를 경청하고 설득한 누군가가 있었을 것이다. 나무기둥 사이에 화분이 놓여있다. 나무를 가져다 쓴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이일 것이다.



돌아 나오는데, 보살님 한 분이 묻는다


-좋은 사진 많이 찍으셨어요?

-네, 감사합니다.


차 한 잔 대접할걸 그랬네요,라고 말하는 그분에게 다시 한번 합장을 하고 고마움을 표한다. 맑은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진다. 암자 옆 동백나무 아래에서 카메라를 안은 채 잠시 쉬다가 다시 대나무 숲길로 향한다.  



대웅전으로 돌아오니 예불 소리가 들린다. 옆의 불당에 걸터앉는다. 뜻을 알 수 없는 소리가 귀를 채운다. 할머니 한 분이 연등 아래를 걸어간다. 중년의 부부가 지나친다. 줄지어 걸어놓은 연등 사이로 하늘이 보인다.



화려하다.



괴색(壞色) 가사를 걸친 스님이 앞서간다. 뒤따른 스님의 손에는 아직 펼치지 않은 가사가 들려있다. 이물이 없는 광장을 질러가는 그들은 풍경을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올라갈 때 보았던 이곳의 고요함은 둘의 걸음으로 더욱 짙어진다. 각황전 계단을 오르는 그들은 정해진 법도에 따라 예불을 드릴 것이다.


규율로서 단정함을 유지하는지, 단정함을 따름으로써 규율이 지켜지는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아침나절 절을 둘러보는 구경꾼에게 화엄사의 단정함 고마울 따름이다.



여전히 경내에 사람은 거의 없다.


각황전 옆 작은 불당 앞에서 마지막 쉼을 한다. 봄을 등에 엎은 나무의 녹색이 곧 날아갈 듯 경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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