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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Jul 11. 2020

제주 '중도포기' 여행

늘 그랬다. 제주에서는.


하나라도 더 보려고 허둥지둥, 제대로 봐야 한다는 생각으로 열심 열심. '누군가 좋았다던 어디'를 검색해서 찾아가고, '남들만큼의 인증샷'을 남겨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고, 그로 인해 제주라는 시공간이 숙제를 준다는 묘한 느낌을 받곤 했다. 매일매일의 풍경에 벗어나 쉬려고 왔는데, 제대로 놀고 온전히 담아야 한다는 생각 무리달까.



처음 올레길을 걸을 때 특히 그랬다. 코스에 적혀있는 시작점과 종료점을 딱 지키고 싶었다. 실제로 설명에 있는 감상 포인트를 충실히 따르며, 슬쩍 건너뛰어도 되는 곳도 지나치치 않고 클리어했다.


완주, 그게 뭐라고.  


이번에 제주에 와서도 비슷하게 돌아가는 듯했다. 저녁 늦게 서귀포 숙소에 도착해서 내일 어디 갈지부터 검색했다. 그리고 코스의 시작과 끝, 소요시간을 메모했다. '이 정도면 휴가가 아깝지 않겠지'라는 생각 들고서야 잠을 청했다.



첫 번째 목표는 한라산 둘레길이었다.


다음날 아침,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둘레길인 '동백길' 입구로 찾아갔다. 전날 온 비의 여파인지 아침 안개가 조금 있었지만 길을 걷기 시작할 즈음 해가 나왔다. 좋았다, 처음에는. 입구에서 이어지는 길은 넓고 표지판도 친절했다. 새소리를 벗 삼아 호젓한 을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온 계곡은 눈이 시원했다. 앞뒤로 다른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한라산을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동백나무 숲'으로 들어서면서 슬슬 조급함이 들었다.


깊은 산의 나무들은 비슷한 풍경이었고, 동백나무가 빽빽한 숲은 습기가 가득했고 음침했다. 온몸에 땀이 나면서부터 날벌레들이 달려들었고, 길 중간에 쳐져있던 거미줄이 얼굴에 엉겨 붙었다. 어제 온 비로 숲길 군데군데 물웅덩이가 있어서 피해 걸어야 했는데, 요행히 마른땅처럼 보이는 곳을 디뎌도 운동화의 절반 정도가 물에 잠기도 했다. 노루의 배설물과 썩은 낙엽이 한데 섞인 흙은 검었고 불쾌한 냄새가 났다.


더 걷다 보니 조급함과 더불어 공포가 찾아왔다. 동백숲 중간에 뒤에서 따라온 등산객 세 명이 나를 지나쳐간 걸 빼고는, 길 위에 사람은 나 하나였다. 자랄 대로 자란 한여름의 나무들이 하늘을 가려서 숲은 어두웠고, 어디서 뭐가 튀어나와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원체 겁이 많은 성격이라, 호젓함을 즐기던 여유는 금세 사라졌다. 풀이 침범하고 물웅덩이로 군데군데 막힌 좁은 산길에서, 약간의 소리만 나도 멈춰 서서 두리번거리기를 반복했다.

 


멀리 노루랑 마주쳤을 때는 기절할 뻔했다.


나무가 부러지거나 새가 날아오르는 가벼운 소리가 아니라, 묵직한 뭔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 쳐다보니 옆의 수풀에서 노루가 날 쳐다보고 있었다. 멈춰 서서 혹시 저 노루가 내 쪽으로 오지는 않는지 노려봤다. 다행히 노루는 나만큼이나 겁이 많았는지, 잠시 후 숲 깊숙이 달아났다. 한라산 노루랑 좀 더 낭만적으로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두 번째, 세 번째 노루랑 만났을 때도 난 호들갑스럽게 놀라고 조용히 노루가 물러나길 기다릴 뿐이었다. 조급함을 훤히 내보이면서.



그러다가 푯말이 하나 나타났다.


지금까지 내가 온 게 3km였고, 앞으로 도착 지점까지 9km가 남았다고 적혀 있었다. 나름 숲길을 오래 헤쳐왔다고 생각했는데, '고작 그만큼'이었다. 푯말을 본 후 그나마 남아있던 여유는 완벽하게 사라졌다.  


한라산 중턱을 걷는 이 둘레길은 올레길과 다르게 중간에 그만두면 바로 도로나 마을로 나갈 수 없었다. 길의 시작 지점인 무오정사와 종료점인 돈내코 사이에는 두 개의 탈출구(산 아래로 내려가는 길)만 있었다. 일단 이 외길을 벗어나자고 마음을 먹고 사진도 거의 찍지 않으며 빠르게 걸어 첫 번째 탈출구가 있는 갈림길에 도착했다. 하지만 막상 그곳에 가서 산 아래쪽으로 나있는 널찍한 길을 보며 고민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끝까지 가는 게 맞지 않을까?'


천으로 된 운동화는 이미 양쪽 다 흙 범벅에 양말까지 젖어있었고 온 몸이 끈적한 상태였기에 산을 내려가는 게 더 합리적인 선택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고민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이렇게 중도에 포기하면 제대로 봤다고 할 수 있을까'


완주에 대한 강박이었다. '이대로 내려가면, 내가 한라산 둘레길을 걸었다고 어디 가서 말할 수 있을까', '아직 남아 있는 길에 내가 지금 본 것보다 더 나은 뭔가가 있지 않을까', '제대로 한라산을 담지 못하고 내려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러다 순간, 웃었다.


그게 뭐라고.

한라산의 계곡을 호젓하게 즐긴 건 나였는데. 모양 빠지긴 했지만 한라산 노루랑 눈싸움한 것도, 투덜대면서도 질퍽한 길을 헤쳐온 것도 나였는데...... 지도에 나와있는 길을 '전부 걷지' 못하면 불완전하다고 생각하는 게 우스웠다.


이 코스의 설계자가 내 취향이나, 날씨, 습도 등을 다 예상했을 리도 만무한데, 도착점까지 완주하지 못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즐겁게 내려왔다.


물론 2km가 넘는 하산길에도 사람은 없었고, 조그만 소리에 여전히 놀랐다. 하지만 하늘을 가린 울창함이 없어진 어느 시점부터, 양 옆에 즐비한 고목들이 눈에 들어왔다. 걸음을 늦추다가 멈추고 사진을 찍었다. 여유를 되찾은 채 나무 사이를 걷고 즐겼다. 땀과 습기로 찐득했던 피부도 말랐다.




이어 들어선 전나무 숲에서는, 평소라면 사무실 책상에서 서류 작업을 했을 시간에 이 아득함 속에 서있는 게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도포기 하길 잘했구나.


안 그랬으면, 이 숲을 미워하고 무서워하면서 '그깟 킬로미터'를 줄이는 바보 같은 짓이나 했을 것이다. 하지만 중간에 놓고 나니, 제주의 아름다움을 다시 즐길 수 있었다.


 

다음날, 올레 8코스에서는 중도포기를 아예 염두에 뒀다. 

완주할 생각은 하지 않고, 친구의 동선에 맞춰 코스의 '어중간한 중간 지점'에서 걷기 시작했다. 어느 쪽으로 갈지도 깊이 고민하지 않고 예전에 누군가 추천해준 카페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빨리 걸어가는 건 신경 쓰지 않고 중간중간 있는 그림자를 징검다리 돌 삼아 마음 내키는 대로 걸었다. 하도 땡볕이라 중간에 나온 베릿내 오름은 아예 쳐다보지 않았다. 자주 쉬고 중간중간 질러가는 게 길을 즐기는 방법이겠다 싶었다.



관광객들이 쓱 보고 지나가는 주상절리에서는 맘 놓고 시간을 보냈다.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를 보는 게 이리 즐겁다니...


길은 계속 놓여있었지만 조급할 이유가 없었다. 완주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쉬엄쉬엄 2시간 반을 걷고 나니 카페가 나왔다. 오늘 올레는 여기서 끝. 상큼한 기분으로 산미구엘 한 병을 앞에 놓고 쉬었다. 대충 사진 몇 장을 찍고 의자에 몸을 구긴 채, 옆 테이블 커플의 여우짓을 귀로 들으며 한참 졸았다. 만족스러웠다.



포기한 순간부터, 풍경이 제주스러워졌다.


생각해보니, 중도포기라는 이 스킬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우습다. 걸을 수 있는 만큼만, 볼 수 있는 만큼만, 즐길 수 있는 만큼만 하자는 게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니까. 하지만, 또 바쁜 일상으로 돌아가면 이 단순한 태도를 잊겠지 싶다. 그럴 때 아무렇게나 찍은 '제주의 마무리 사진'을 꺼내봐야겠다. 그러면 어디에서건 조급하게 걷던 걸음을 잠깐 멈추고 온전한 풍경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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