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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Jul 25. 2020

남겨진 다리 위에 서본 적이 있다


통행이 금지된 다리 위.

이제 어떤 것도 책임지지 않는 다리엔, 오래 전의 문신이 드러나 있었다.


그건 시멘트가 굳을 때 내렸던 빗방울 자국일 수도 있고, 갓 완성된 다리의 난간에 기댔던 동네 아이들의 팔꿈치 자국일 수도 있다. 혹은 이 안(岸)에서 저 안으로 넘어가던 바람이 쓰다듬은 길의 결일 수도 있다. 조심스럽게, 그 흔적을 따라 몇 자국 들어갔다.


다리는 여전히 하천의 양쪽을 잇고 있지만, 사람들이 다리에게 기대하는 건 단순해졌다. 스스로의 무게를 지탱하는 것. 안전진단 E등급을 받았다는 표지판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재난이 발생하였거나 우려가 있으면 우선 대피 후 아래 연락처로 신속히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이곳을 오래 지나다니던 사람들은 그런 연락을 쉬이 하지는 않을 것 같다. 쏟아지는 폭우에 하천이 무섭게 몰아쳐도 이 다리는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어떤 믿음을 내보인 채.


 

하늘이 담긴 물이 흐른다.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자란 여름의 풀이 수면을 넘본다. 하지만 물은 자신의 표면을 쉽게 내어주지 않는다. 흘러가기 위해선 바람을 맞을 공간이 필요하니까. 마르지 않기 위해선 비를 받아들일 공간이 필요하니까. 물은 주변의 초록을 먹여 살리면서도 깔끔하게 경계선을 쳐둔다.


하천을 뜻하는 '내'라는 단어가 새삼스러워진다.



다리는 남겨졌다.

그건, 버려진 것과 다르다.


버린다는 건 모질다.

버려진다는 건, 버리는 누군가의 모진 얼굴을 봐야 한다는 뜻이다. 너의 어떤 것도 기억하지 않겠어,라고 힘주어 말하는 그런 얼굴을. 버려진다는 말의 앞엔 '모든 걸 빼앗긴 채'라는 말이 생략돼 있다. 자신과 주변을 이어주는 끈들이 전부 끊어지고 모든 교집합이 사라진다. 그런 이유로 버려진 것들은, 자신이 서 있는 풍경이 낯설어 어쩔 줄 모른다. 버려진 건, 무작스럽게 잊힌다.


남겨진 건 다르다.

다리를 떠난 것들은 여전히 다리를 바라본다. 천은 여전히 소리 내어 흐르고, 석양은 여전히 다리를 타 넘는다. 이곳을 밟아왔던 사람들은 새로 놓인 다리를 오가면서도 남겨진 다리를 쳐다볼 것이다. 낡은 다리에 무심히 놓이는 시선들엔 오랜 정을 나눈 다정함이 있을 것이다. 남겨지는 건 무작스럽지 않다. 그건 조심스럽고 배려가 있는 행위의 결과이다. 어쩔 수 없이 처지가 달라졌지만 잊히지 않는다. 여전히 수없는 선들이 풍경과의 사이에 놓여있다.


멀리 전봇대가 비틀댄다.


어쩌면 전봇대는 낡은 다리를 믿고 직선에서 살짝 일탈하고 있는지 모른다.

다리는 그의 수직을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적어도 전봇대가 줄지어 세워진 어느 해를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그래서 다리가 있는 한 언제라도 자신의 직선으로 돌아올 수 있을 테니까.



조각이 떨어져 앙상한 골조는 누군가에게 무릎을 꿇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 가족에게로 돌아왔을 누군가의 두 다리를 닮았고, 물고기가 만든 동심원들은 좋아하던 상대와의 대화 몇 마디로 세상이 달라 보이던 사춘기 소년의 말랑말랑한 홍조를 닮았다.


모두, 다리 위에 잠시 멈춰서 '그 하루'를 감춰뒀을 것이다.


그리고는 이 다리를 지날 때마다 그 비루하거나 벅찬 하루들을 한 번씩 꺼내어봤을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표정을 지은 채, 그 시간 안에 박제한 스스로의 모습을 쓰다듬으며.



지는 빛의 아래에서, 다리는 고요하다.


하중과 진동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수중을 상상할 수 있는 여유,

풀의 사계와, 전경을 바꾸는 인공의 선들의 미묘한 변화를 관찰하는 시선,

여전히 이곳을 몰래 지나다닐 누군가의 은밀한 뒷모습을 잊지 않는 기억력까지,

긴 세월을 버텨 얻은 멜랑콜리를 지닌 채, 다리는 긴 휴식을 하고 있다.


다리를 떠날 때 여러 번 뒤를 돌아보았다.

낡은 다리에, 나의 하루가 희미하게 남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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