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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Aug 09. 2020

간결한 관계를 대하는 법

토요일 아침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전날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왔음에도 습관처럼 눈이 떠졌다. 비몽사몽 간에 잡생각들을 떠올리면서 누워있었다. 그러다 문득, 어젯밤 들어올 때 골목에서 봤던 철제 선반이 떠올랐다. 골목 구석에 있던 거였는데, 술에 취해서 피곤하기도 했거니와 혹시 버린 게 아니라 누군가 잠시 밖에 둔 걸 수도 있어서 그냥 두고 왔었다. 만약에 누군가 버린 거라면 주워다가, 베란다에 두고 화분 받침대로 쓰면 좋겠다 싶었다. 옷을 꿰어 입고, 밑져야 본전이란 심정으로 골목으로 나갔다. 어제 봤던 선반은 그 자리에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폐기물 스티커가 보였다. 가져가면 되겠구나.



선반을 가지고 오다 보니 골목 한쪽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폐지를 정리 중이었다.


십 년 가까이 새벽에 늘 폐지를 정리하는 부부 중의 한 분이었다. 선반을 집 안에 옮겨놓다 보니, 나중에 버리려고 내가 현관 앞에 쌓아뒀던 박스 더미가 보였다. 많지는 않았는데 늘 신경이 쓰이던 터였다. 박스를 들고 내려가다가 잠깐 멈칫했다. 생각해보니 난 수년째 그분들을 보면서도 대화를 해본 적이 없었다. 밤늦게나 이른 새벽에 우연히 마주쳤을 때 괜히 먼저 아는 체 하기도 뭐해서 인사도 하지 못했다. 그분들이 대개 우리 집 담벼락 옆 공간에 리어카와 카트를 세워뒀기에 폐지를 버릴 일이 있을 때면 거기에 내놓았을 뿐이다.


지금 폐지를 가져다주는 게 혹시 작은 오해라도 불러일으킬지 생각했다.


그냥 집 앞에 내놓지 않고 굳이 일하는 데 옆에다가 놓는 게 친절이 아니라 다른 의도로 보이면 어쩌지. 잘 묶은 커다란 폐지 더미가 아니라 여남은 개의 작은 박스 정도라 서로 민망하지는 않을까. 하지만, 지긋지긋한 비가 다음 주까지 온다는 예보가 있었고, 이번 주 다음 주 통틀어 오늘이 유일하게 날이 갠 날이었기에 박스를 버릴 시간은 오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오후부터 비가 온다니, 지금이 박스를 내다 버리는 게 가장 좋은 시간이었다.



어색한 상황은 눈인사나 목례로 때우자고 생각하고 카트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속으로는 '그래도 오래 동안 얼굴을 봤었는데 인사 정도는 반갑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긴 했다. 쭈뼛대면서 다가가서 카트 옆에 박스 더미를 놓으려는데, 할아버지가 한 마디를 했다.


"젖은 거면 도로 가져가요."

"네?"


잘 못 알아들어서 되묻는 나에게 할아버지는 한번 더 반복했다. "젖은 거면 도로 가져가라고." 나 같은 고민(얼굴을 대충 아는데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은 전혀 없는 말투였다. 편의점 직원이 '포인트나 할인 카드 있으세요'라고 묻는 것과 비슷한 그런 말투. 듣는 사람이나 말하는 사람이나 메시지만 전달되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필요 없는 문장이었다. 젖은 폐지는 고물상에서 받지 않는다.


"현관 앞에 비 안 맞는 데 뒀던 거라 안 젖었습니다."

"그럼 카트 위에 두고 가세요."

"감사합니다."


대화는 간결하게 끝났다. 폐지를 놓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을 만들면서 잠시 생각해보니 내가 은연중에, 밝게 인사를 주고받고 웃으면서 수고하시라고 말하는 그런 판에 박힌 대화를 상상했지 싶었다. 나보다 나이 든 분들이니까 조금 더 편하게 인사를 받아주리라는 기대도 조금 있었달까. 하지만 그분들 입장에서 나는 수많은 '얼굴만 스치는 동네 사람' 중의 한 사람일 뿐이었다. 나는 그분들과 매일 아침 반갑게 대화를 나누는 환경미화원도 아니었고, 수십 년 동네에 살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진 원주민도 아니었다.


말하자면, 간결할 수밖에 없는 관계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 분과 내가 나눈 대화는 매우 합리적이기도 했다. 겨우 폐지 몇 장을 매개로 십 년 가까이 데면데면했던 관계가 변하는 것도 이상했다. 어쩌면 내가 일종의 훈훈함을 기대하고 있었지 싶다. 두 부부 혹은 부부가 깔끔하게 갈무리해놓은 폐지 더미를 매일 봐왔기에 나 혼자 친숙하다가 생각해버린 것이었다.



당연히 인간관계에 있어서, 친숙함을 바라는 그런 기대가 나쁘진 않다.


서로 비대칭으로 기대하더라도, 몇 마디 말이 오고 간 뒤엔 어느 정도 수평이 맞춰지게 마련이니까. 하지만 친해지기 위해 이런저런 얘기로 대화를 먼저 시도하는 건 내 성격 상 불가능하다. 업무 관계로 누군가와 처음 만났을 때나, 어떤 집단으로 묶였을 때는 억지로라도 몇 마디 거들 순 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을 제외한 경우 난 상대방이 부담스러워할까 싶어 무리해서 대화를 시도하지는 않는다. 처음 보는 사람을 같이 어색하게 만드는 '천형적인 재주'와 몇 개의 준비한 말이 떨어지면 멀뚱멀뚱 다른 곳만 쳐다보는 '선천적 대화 기술 결핍'이 있기에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지금보다 나이가 어렸을 때는 나와 다른 성향의 사람들을 많이 부러워했다. 거부감이나 어색함 없이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가 금세 친해지는 그런 모습을 보며 '조금이라도 노력을 해야 하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간결한 관계라면 굳이 그런 시도는 없어도 되지 않을까.   


할아버지가 나한테 말할 때 감정이 실려있지 않았고, 듣는 나도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서로의 속내나 기분을 애써 알아보지 않아도 되는 그런 관계였다. 만약에 (실제로 안 그런) 내가 수더분한 척을 하며 대화를 시도했으면 서로 더 어색해지지 않았을까. 모든 새로운 만남을 잘 맺으려는 건 욕심이지 싶다. 무리를 해서라도 끈끈하게 유지할 관계도 있지만 적당한 거리가 필요한 관계도 있다.


그럼에도 오늘 같은 상황이 몇 번 반복되면 주고받는 대화도 조금 길어질 것이다. 그러면 이 동네에서 알고 지내는 얼굴 하나 늘어나지 싶다. 물론 내가 젖은 폐지를 갖고 가지 않는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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