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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Nov 15. 2020

내력이 없는 동네

내력이 없는 동네에서 지내고 있어

누가 힐끔대거나 누구를 넘겨보지 않아


기록을 지 않아도

이곳에선 빈 시간을 보낼 수 있어

그게 세상을 사는 단 하나의 방법인 양

초침 하나 빼먹지 않으면서



꿈의 길이가 줄어든다고 우는 아이를 봤어

아이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지우개를 놓아주었어


아무런 구석이라도 지워놓으면

그곳을 꿈이 메워줄 거라는 말은 못 했어

아이가 나를 지우는 바람에


욕조가 된 남자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어

그는 수돗물을 가득 채우고

누군가를 받아들이고

배수구 뚜껑을 연다고 했어


다시, 물을 찰랑일 때까지 받은 후에

안도의 한숨을 쉬고

다른 누군가가 씻으러 오길 기다린다지


채우고 비워내기를 반복하는 그의 갯벌엔

수줍은 생물들이 많이 산다고 해

순純, 탁濁, 침沈, 암暗 같은 이름을 붙여주느라

하루에 두 번씩 오는 밤을 꼬박 새운다며

그는 하품을 하다가 잠들었어



노을이 닫힐 시간이야

벌건 수면 아래로 하루를 모조리 던져버려야 해

지금 말한 것까지 전부 다


걱정은 하지 마

남기지 않아도 시간은 줄어들지 않으니까

이름이 없어도 풍경은 가야 할 곳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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