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너무 다른 역할 Nov 23. 2020

잔여기억 (殘餘記憶)

이른 새벽

남아버린 어제의 기억을 앞에 두고 고민에 빠졌어

꿈속에 다 쏟아버렸어야 했는데

새벽 에 증발하도록 널어놨어야 했는데


어제가 남는 게 싫어

어제의 기분을 가지고 오늘을 시작하는 게 영 별로야

좋은 기억이 많았건 그렇지 않은 기억이 많았건 마찬가지로



잔여기억을 소각해주는 남자를 만났어

그는 사람들이 내놓은 기억을 저울에 달고 무게만큼 돈을 받아

기억의 종류나 냄새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아

오로지 무게만이 중요해

남자는 등에 지고 있는 커다란 통에 계산이 끝난 기억을 담아가 버려


그가 어디서 그걸 처리하는지는 아무도 몰라

듣기로는 남자는 어느 산의 입구에서 안대를 꽁꽁 맨다고 해

관자놀이의 핏줄이 성성해질 정도로

그리고는 산을 휘감고 있는 안개 소리에 의지해서

하나밖에 없는 산길로 들어간다지


남자는 한 번도 불평한 적이 없어

그에게도 본인의 하루하루가 있을 텐데

하루를 지낼 때마다 쌓이는 기억을 처리해야 할 텐데 말이야


남자는 아침 해의 꼬리가 사라질 즈음 다시 산을 내려온다고 해

등에 진 통뿐만 아니라 자신의 동공도 비운 상태로



누가 남자에게 물어본 적이 있어

자신이 버리지 말아야 할 기억을 실수로 버렸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그는 자신의 등에 멘 통을 가리켰다고 해

꼭 되찾아야 한다면 통으로 직접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듯


남자에게 질문한 사람은 그제야

남자의 다리가 하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대

남자가 자신의 통으로 들어가다 머뭇대는 장면이 떠올랐지만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대

누구나 마음이 바뀌곤 하니까

대가가 있는 걸 알면서도 의지를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으니까


질문을 멈춘 남자가 기억을 되찾을 생각을 없다고 하자

남자는 대신 방금 나눈 대화를 통에 넣으라고 했다는군

돈은 받지 않을 테니 모조리


그러겠노라 대답한 그 사람은 기억을 모조리 넣는 척하고 도망쳤다고 해

그리고 지금까지 계속

모르는 사람들의 과거 속을 떠돈다는군

남자를 만난 이야기를 반복하면서



어제의 기억이 아침 거리에 흩어져 있어

덕분에, 양말은 계속 말려 올라가고

왼쪽 눈에 들어간 눈썹 하나는 빠져나올 생각을 안 하네


기억을 태우는 남자는 이미 내 집 앞을 지나갔을지도 몰라

내가 새벽잠을 못 참고 졸다가 못 봤거나

목이 잠겨 남자를 보고도 부르지 못했을 수도 있지


남자가 언제 찾아올지는 모르겠어

그때까진 내 남은 기억을 친절하게 보관할까 해

오늘 만나게 될 첫 기억을 대하는 것처럼





매거진의 이전글 내력이 없는 동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